'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Matthew 22:39)

CHURCH OVERVIEW

SUNDAY SERVICE THIS WEEK

OUR CHURH THIS WEEK

SERMON SUMMARY

PASTOR'S COLUMN

PHOTO, VIDEO

NYPPC FAMIMIES

YG & EM

ANNA MISSION

MEN MISSION

WOMEN MISSION

TIMOTHY MISSION

PORT WASHINGTON

LONG ISLAND MJ

QUEENS MJ

BAYSIDE MJ

MISSION NEWS

BIBLE

BIBLE MAP

PEOPLE IN THE BIBLE

LISTENING TO PRAISE SONGS

DOCUMENTS & FILES

New York Philadelphia Presbyterian Church

1/15/2012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           말라기 3:7-12

 

전세계가 재정압박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약속하고 계신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첫째로, 쌓을 곳이 없이 내려주시는 복은 회개할 때에 주시는 복이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회개를 촉구하신다.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선지자는 그 원인이 죄라고 선포하신다. 제사장들이 범죄했고, 백성들이 범죄했다. 무엇을 회개하는가? 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을 회개해야 한다 (7절). 나)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 (8절)을 도적질 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다)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을 회개하라 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토산과 땅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셨다. 이런 경제적인 사회적인 재난을 극복하는 비결은 성경적인 재정관리를 함에 있다. 재정 압박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명령이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신 유일한 말씀이 본문의 말씀이다 (10절). 사단은 우리를 물질의 노예로 삼고, 돈으로 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한다. 물질의 노예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로 주는 생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둘째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누리게 된다.

1)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축복인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이다. 십일조는 여호와께 아주 바친 물건이다. 여호와께 드려진 성물이란 말은 체렘이란 말과 연결되어진다. 체렘의 의미는 파괴되기 위하여 주님께 드림을 말한다. 레위기 27장에서 체렘을 설명하신 다음에 십일조를 말씀하셨다. 여호와께 바침이 된 것을 만지만 만진 사람도 역시 바침이 되어진다. 가나안 정복의 처음의 도시 여리고는 바쳐진 도시이었다. 아간이 멸망당할 것에 손을 대니까 그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역시 멸망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물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은혜받고,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임하고, 축복이 임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물이라는 말은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여유가 더 생기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2)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 이전에 주신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경배와 감사의 고백과 함께 드렸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 (창14장). 야곱도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릴 것을 약속했다 (창28:20). 3)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히7:1-4). 따라서 십일조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 십일조의 태도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보여주신다 (창4장). 십일조의 태도는 우리의 모든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 믿음의 제사를 받으신다. 비행기 타는 사람과 조정하는 사람이 다른 것 처럼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십일조를 원리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십일조를 통해서 주시는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은 총체적인 복이다. 

먼저 십일조는 신앙고백적 의미가 있다. 가)십일조는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인정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여호와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십일조를 드릴 때에 신앙의 진전이 있다. 또한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1)십일조에는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축복이 있다. 가)하늘의 문을 열린다 10절. 그 결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리라 약속하셨다. 나)공격하는 원수와 싸워 주신다 (11절).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재앙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금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나)땅이 아름다워 진다. 계명을 순종하면 그 땅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을 약속하셨다.  다)모든 세계가 부러워 하는 복을 받는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누리고 싶은가?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달리기를 소원하는가? 이 모든 시작이 십일조에 있다. 이제 말씀의 씨를 심고 순종하자. 재정 압박의 계절 속에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녀들로 살게 되기를 축복한다.

 

 


 

1/8/2012          교회의 일꾼들           딤전 3:8-13

 

오늘은 제직 임명 주일이다. 집사는 장로님들의 지도 아래서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감당하는 영적인 리더를 말한다. 성경적인 사명을 깨달아서 충성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소원한다.

 

첫째로, 집사의 직분이 무엇인가?  집사는 교회의 일군이다.

집사는 먼지를 일으키며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다. 일군 또는 종으로 번역되었다. 특별한 의미로 교회의 직분을 말한다. 집사의 기원은 사도행전 6장에 나온다. 사도들이 구제를 감당하다 보니까 비효율적이고 문제가 생겼다.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를 위해서 일곱 집사를 선택했다. 사도들은 다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게 되었다. 집사의 자격은 장로들과 같이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8절). 하나님은 우리가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군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집사의 자격은 행6:3 에 요약되고 본문에서 확대 설명되어진다. 행6:3에 의하면 집사는 1) 좋은 칭찬을 듣는 사람이고, 2)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고, 3)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 본문은 집사를 3가지 자격으로 구분한다. 1)인격적인 자격이 있다 (8-9). 단정하고, 일구이언 하지 않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9절). 2) 집사를 세울 때의 실제적인 권면은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후에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하라 하신다. 3) 집사의 가정도 중요하다. 왜 섬기는 직분에 이러한 자격을 요구하시나? 그것은 섬기는 생활이 최고로 영광스러운 사명이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둘째로, 집사의 사역은 어떻게 해야하나?

집사의 직무는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섬기는 일에만 힘쓰도록 교회의 다른 일을 봉사하여 사도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사는 구제하는 일과 먹이는 일만 (행6:2) 하지 않고 영적 지도자로 활약한다. 스데반과 빌립은 말씀과 전도자로 봉사한 집사이다. 집사는 교회의 실제적이고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책임이 있다. 집사는 회중의 소유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장로회 헌법 정치에는 집사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제직회 회원이 되어 교회를 봉사한다. (2) 헌금을 수납한다. (3) 구제에 관한 일을 한다. 또한 집사의 직무를 잘 감당하려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에 유의하여야 한다. 첫째, 목사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집사는 교인의 모범자가 되어야 한다. 세째, 집사는 교회 재정의 좋은 관리자이어야 한다. 네째, 집사는 교인의 좋은 상담자가 되어야 한다. 집사가 교인을 사랑으로 대하면 집사는 신임을 받게 되고 교회는 발전하게 된다. 집사는 목사와 교인 사이의 가교가 되어 재정을 맡아 교회를 봉사하여 교회와 목사의 보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집사가 다 지도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사명을 자각하고 노력하여 교회 성장에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교회의 일군인 집사에게는 상급이 있다.
집사의 사명을 잘하면 1) 먼저 교회가 축복받는 것을 본다 (행6:7). 초대교회가 집사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움은 사도들과 집사들의 협력함에 있었다. 성령 충만하고, 지혜 충만하고, 믿음 충만의 열매로 교회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충성하면 교회의 위기가 기회로 바꾸어지게 된다. 또한 개인들이 받는 상급이 있다. 2) 사명을 다한 집사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 존귀함을 얻는다 (딤전 3:13). 잘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는 상급이다. 주님은 비유와 말씀을 통해서 종들, 일군들이 받는 상급을 거듭 강조하셨다. 충성한 자에게 상급이 보장되어 있다. 3) 더 나아가서 믿음의 담력을 얻는다. 먼저 충성한 집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경험하고 말씀을 사용하는 담력을 얻는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사람들이 섬길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쓰심을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일할 수 있는 일감을 주시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도 믿어야 한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최고이다. 충성하는 한해가 되자! 충성하는 생애가 되자! 천국에서 아름다운 상급으로 칭찬받는 인생을 살자!

 


 
1/1/201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4-40 

주님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관계의 DNA 를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이 관계를 갖도록 창조하셨다. 
 
첫째로, 우리는 3가지 좋은 관계를 갖도록 창조었다.
먼저 1) 우리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우리가 인식하든지 하지 못하던지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한다.  2)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독처하는 것이 좋치 못하니” 하셨다. 아담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우리는 관계가 필요하다.  가정, 친구들, 신앙의 동지들, 동역자들, 이웃, 학교 친구들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들이 다 건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려운 관계들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들을 갖도록 창조하셨기에 관계들이 없을 때에 우리의 인생은 비참하게 된다. 3) 우리는 나 자신과의 건강한 관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우리가 어려운 관계를 경험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많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거나, 자기 도취에 빠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에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자신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든든해 짐. 집에서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와 관계도 강하여 지게 된다. 
 
둘째로, 이 세가지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의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마22:40). 1)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관계로 요약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또한  나 자신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가장 큰 계명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관계가 우리의 영적 DNA 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 되는 이유이다. 이 세가지 관계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인생의 충족함을 경험한다. 2) 이런 관계 중에 하나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다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가는 다른 사람들고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을 때에 모든 관계는 다 망가지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이 세가지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 되어져 있음을 매우 어렵게 배운다 (창3장). 사단이 와서 선악과를 가지고 유혹을 할 때에 이브가 먹고, 아담도 먹었다 (창3:1-7). 이들의 불순종의 행동은 3가지 관계의 역동성을 변화시켰다. 불순종은 아담과 이브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창조하셔서 가장 완전한 환경에 두신 바로 그분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온다. 죄가 아담과 이브의 서로 가졌던 관계를 바꾸었다 (창3:11-12). 사랑의 관계에서 반목과 다툼의 관계로 깨어진다. 죄는 아담과 이브가 가진 자신들과의 관계가 바꾸어지게 한다. 그들은 죄로 인해서 망가졌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금년의 말씀은 마태복음 22:39 말씀이다. 특별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명령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에 성공할 수 없다. 또한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이웃에서 예수를 몰라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의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소원이시고, 가르쳐 주신 전도의 방법이다. 금년에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영혼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새해를 축복의 해로 만들어가자!

 

12/25/11           경배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2:8-20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는 찬양에 대한 기록이 가득하다.

 

첫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경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첫번째 반응은 경배이었다. 1)하늘에서는 천사들의 찬양이 있었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군 천사들이 하늘에서 무리를 이루어서 찬양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청난 소식이다. 2) 땅에서는 목자들이 경배를 드렸다.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달려가 예수님을 보고 경배를 했다. 3)동방박사들은 먼길을 달려와 경배를 드렸다. 동방박사들은 단 한번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수개월의 많은 시간과 많은 자원과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예배는 엄청난 투자를 할 가치가 있다. 4) 시므온과 안나는 메시야의 오심을 평생동안 기다려왔는데, 성전으로 처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를 드렸다. 예배는 기다리고 사모할 가치가 있는 축복의 통로이다. 우리가 오늘 모인 것은 경배하기 위하여 모였다. 경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함을 볼때에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경배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 뵙고 경배를 안 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예배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사람 없다. 경배하는 사람이 되자!

 

두번째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세워져 간다.

경배는 1) 우리의 신앙의 불을 붙여주고 또한 유지시켜 준다.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에 경배함을 통하여 힘을 얻는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시고, 얼마나 크신 분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2) 경배는 우리의 삶의 압박 속에서 삶의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긴급한 일에 빠져서 사는 우리에게 정기적인 예배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바른 순서를 세워준다. 그리고 예배의 중요성을 실천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더 든든해진다. 3) 경배를 통하여 믿음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강해진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예배하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는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렇다면 경배의 초점은 누구인가? 경배의 초점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탄의 초점도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시다. 경배는 사람이 받아서는 안된다. 승리하는 예배생활로 능력있는 삶을 누리자.

 

셋째로, 경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누리게 된다.

누가 성탄의 복을 누리는가? 1)성탄절에 가장 신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목자들은 무시당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목자들도 성탄절에 재미 본 신나는 축복을 받은 보통 사람들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 물론, 동방박사들은 지위와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뵙게 될 때에 넘치는 감격으로 경배를 드렸다. 성탄의 예수님께 드리는 경배는 남녀 노소도, 빈부귀천도, 지위고하도, 사람의 인종도, 그 어떤 경계도 초월하는 넘치는 은혜이다. 2)경배의 중심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경배의 중심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는가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하여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힘이 들어도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경배의 힘은 나의 받은 축복에서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3)진정한 경배는 우리의 삶을 바꾼다. 목자들은 변화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 하나님과 만남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보라.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그냥 똑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기 예수를 만나뵙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또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도 경배를 드림을 통해서 성탄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복한다.


 

12/04/2011            네 믿는대로 되리라            마태복음 8:5-13

 

이방인인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을 가졌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믿음이라고 하시면서 천국을 약속하셨다. 백부장의 믿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절대로 믿고 / 복종하는 믿음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 1) 백부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했다 (6절). 그는 유대인들을 돕고 회당까지 지어주었다. 이방인인 그가 유다 백성을 사랑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2)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을 사랑했다. 중풍병이 들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하인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고, 직접 예수님을 찾았다. 그의 인류애, 겸손함이 보인다. 예수님의 칭찬은 그의 인류애 때문이 아니다. 3)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른다 (v5). 백부장의 주는 로마의 황제이다. 초대교회 수 많은 성도들은 황제숭제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기에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인 그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다. 나의 주군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라는 뜻이다.  이런 이방인의 신앙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신다. 예수님은 인종과 지위 등에 대한 차별 조건을 두지 않으신다. 또한 '내가' 가서 고쳐주신다는 말씀은 권능이 주님께로 부터 나옴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주님을 하나님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은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신다.

 

둘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이 지극히 크심을 절대 확신하는 믿음이다.

백부장은 백부장은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믿었다. 어느 정도 믿었는가? 큰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믿었다.  더 나아가서, 백부장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한다. 그는 예수님이 집에 오셔서 고쳐 주신다고 하시는데 "주님이 오심을 감당치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 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 앞에서 무가치함을 고백할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초월성을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진실로 강해진다. 백부장은 큰 믿음을 실천한다. "멀리 있어도 능력이 나타남을 믿습니다. 만지지 않으셔도 고치실 줄 믿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는가? 우리의 말, 행동, 태도, 얼굴 표정, 결정이 우리의 신앙을 증거한다. 주님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 주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버릴 것을 버리라!

 

셋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다. 백부장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구원과 유대인들의 배척을 예언하신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은 무엇일까? 1) 말씀에 확고한 성도가 일등 성도이고 알곡 성도이다. 예수님이 주인되심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사람을 최고의 믿음으로 보신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말씀만을 확신하는 신앙이다. 물론 체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체험보다 더 큰 믿음은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요20:29).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표적과 기사와 은혜는 결국 그 말씀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다 (마9:1-6). 또한가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나의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하신다 는 사실이다. 이것이 '네 믿은대로 되는 축복' 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믿는 백부장의 반응은 말씀하신 즉시 믿는다.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그냥 믿고 돌아간다. 결과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시로 그 하인이 나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는가? 모든 것이 믿은대로 된다. 이것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믿음의 법칙이다. 하나님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는 만큼 나타난다. 과연 나는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부정적이고, 연약하고, 인간적인 것들을 버리자. 믿음없는 태도, 믿음없는 말, 믿음없는 행동, 믿음없는 결단을 버리자! 주님을 하나님으로 주인으로 확신하는 생활을 통해서 '네 믿은대로 되리라' 약속이 응답되는 생활을 살기를 축복한다.


 
11/27/201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1-13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은 우리에게 감사의 이유들이 있는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는가?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감사를 찾아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리자 (3절)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심을 즐기신다.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 주신다.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죄의 형벌을 폐지해 주신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동이 샘솟아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향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간다. 나의 죄를 용서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구속해 주심을 감사드리자 (4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진정한 예술품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주고 샀는가 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지불하셨는가 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그 댓가로 지불하셨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주셨다. 하나님의 가치를 주시고 나를 사셨다. 하나님의 가치는 얼마이실까? 무한대의 가치가 있으시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지옥에서의 형벌로 부터 구해 주시고, 악한 마귀의 사로잡음으로 부터 구원해 주셨다. 나를 구속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심을 감사 드리자 (3절)
치유는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 의학, 수술, 치료는 하나님의 치유사역의 연장이시다.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모든 질병을 다 고쳐 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다. 시편기자는 다윗은 자기의 영혼을 말하고 있다. 육체에 오는 질병들은 병원에 가서 약과 수술로 고침을 받는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영혼에 오는 온갖 질병들 죄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깨끗함을 받는다. 내 속에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허락할 때 우리를 온전케 치유하힌다. 나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감사드리자 (4절)
여기서 인자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은 변함이 없으시다. 나의 평생에 정녕 따르는 사랑이다 (시편23:6).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만족케 하심과 새로움 주심을 감사드리자 (5절).
사람들은 만족이 되어도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만족한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더한 것을 추구한다. 만족을 원하지만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하나님께 채움을 받고 채워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찾을 때 우리를 받아 주신다. 허락해 주신다. 그리고 채워주신다. 내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그래서 다윗처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 외치면서 살 수 있다.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하시며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시 107:9 ). 더 나아가서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신다 (5절). 독수리는 해마다 털갈이를 통해서 새롭게된다. 오래산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워지고, 신선해지고, 부흥되어질 수 있다. 새롭게 된 영혼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행하셨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시간을 내어서 감사를 드리자. 긴 감사를 드리자! 큰 소리의 감사를 드리자! 풍성한 감사를 드리자! 감사하기를 시작할 때에 문제 해결을 주실 것이다! 기쁨의 감사를 드리자!

 

11/20/2011          위기를 극복하는 찬양                     역대하 20:1-30

 

현대는 위기의 시대이다. 모든 면에서 위기이다. 여호사밧은 위기를 승리로 전환하는 은총을 누린다. 위기를 승리로 전환하는 능력은 찬양이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찬양은 무엇인가?

 

첫째로, 위기에서 승리로 전환하는 찬양은 기도의 찬양이다.

찬양은 기도이다. 먼저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가? 1) 예고된 하나님의 재앙이 왔을 때에 우리는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우상숭배자 아합과의 동맹하는 것을 거뻐하지 않으셨다 (19:2). 위기가 나의 죄로 왔던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아서 왔던지 두려움의 해결방법은 동일하다. 위기 중에서 하나님을 향하여야 한다. 기도이다. 여호사밧은 기도운동을 일으킨다. 온 공동체가 함께 기도한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이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주신 능력은 강력하다. 기도의 무기를 사용하여야 한다. 때로는 2)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에 오는 위기도 기도로 이겨야한다. 여호사밧의 제2차 종교개혁을 진행한다 (19장).  사단의 공격으로 오는 위기를 어떻게 반응하나? 이것도 역시 하나님을 찾음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위기가 있는가? 기도하자! 금식하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자.

 

둘째로, 위기에서 승리로 전환하는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찬양이다.

위기 속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그리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1)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한 기도를 드린다 (7-9절). 말씀을 통해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v12) 기다린다. 2) 마침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함을 인정하라 (15절)  (나) 더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실 것이이다 약속하셨다. 3) 믿는자의 반응은 찬양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은 예배이었다. 여호사밧 경배하고, 레위사람들이 경배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온 백성이 경배하고 찬양함  4) 말씀을 믿는 자의 반응은 믿음으로 행한다 (20절). 하나님을 믿는다 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선지자를 믿는 것이다. 주시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에 반응하신다. 말씀에 근거한 찬양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준다. 원수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믿음의 행동이다. 위기 중에 주시는 말씀을 사모하자! 위기 중에서 주시는 말씀을 확신하자!

 

셋째로, 위기에서 승리로 전환하는 찬양은 감사이다.

위기에서 승리로 전환하는 찬양은 1)위기에 직면시 드리는 감사의 찬양이다. 위기에 직면할 때에 믿음의 반응은 감사이다(19). 여호사밧이 찬양하고, 모든 백성들이 다 함께 찬양한다. 레위지파의 찬양은 심히 큰 소리 찬양 이었다. 말씀 주심에 감사하고, 감사하니 확신이 생긴다. 큰 소리의 찬양을 드리자! 2)감사의 찬양은 문제해결 이전에 드리는 찬양이다. 이들은 문제가 해결되어서 드린 찬양이 아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찬양드린다. 교훈은 찬양도 감사도 문제 이전에 먼저 드리는 것이다. 왜 문제 해결되지 않았는데 감사하나?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믿기 때문에 찬양한다. 3) 놀라운 것은 감사의 찬양을 시작하니 위기 극복이 시작한다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원수들이 패한다. 믿으면, 믿고 나가면, 믿고 순종하면, 믿고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4)감사의 찬양은 승리의 현장에서 드리는 찬양이다 (25-26). 그들은 문제의 근원이었던 브라가 골짜기에서 찬양한다. 감사의 찬양으로 환경이 바뀐다. 문제의 현장이 송축의 골짜기, 찬양의 골짜기, 감사의 골짜기가 되었다. 감사의 현장에서 뜨끈 뜨끈한 감사를 드리자!  5) 찬양의 클라이막스는 여호와 전으로 나가는 찬양이다 (v28). 브라가 골짜기에서 시작된 찬양은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긴 찬양으로 연결된다. 환경 속에서, 생활 속에서, 문제 속에서 찬양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찬양의 클라이막스는 성전에서의 찬양이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찬양이다. 감사의 찬양은 계속 발전한다. 계속 성장한다. 계속 충만해 진다. 이런 감사를 드리자!

 

위기에서 승리로 전향하는 찬양은 한마디로 말하면 감사이다. 감사가 어떻게 나오는가? 찬양할 때이다.  찬양은 아무 것도 없을 때에 시작한다. 감사의 찬양은 문제의 골짜기를 바르가 골짜기로, 송축의 골짜기로 바꾼다 (26절). 나의 인생의 고달픈 골짜기를 바르가 골짜기로 만들고 싶지 않는가? 감사의 찬양을 드리자!

 

 

 

 


 

11/06/2011                만족하십니까?               빌립보서  4:12-4:13  

가장 복된 생활은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넘침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상황에도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과연 나는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가?

 

첫째로, 만족하는 생활을 방하는 원수들이 무엇인가? Enemies of Contentment
먼저 1) 만족하는 생활의 방해꾼은 비현실적인 기대들이다. 비현실적인 기대치는 만족을 빼앗아 간다.
결혼생활의 비결은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는 최고의 기대를 해야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눈높이를 조정만 해도 만족도가 달라진다. 2) 만족하는 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는 비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만족하게 된다. 주신 것 감사했다가도 비교하면 감사가 사라진다. 부적절한 비교는 우리를 (가) 열등감에 사로 잡히게 하고 (나) 또한 우월감이나,  교만에 사로 잡히게 한다. 비교하지말라. 3) 만족하는 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축복이다.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소홀히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줄로 알라 (딤전 6:6-10) 했다.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들이 축복이다. 믿음은 작은 것들을 축복으로 감사한다. 이것이 영성이다.  4) 만족하는 생활의 방해는 통제되지 않는 야망이다 (약3:16).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적으로 볼 때에 지혜로운 경영자 같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자이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승리하는 비결이고 만족하는 생활의 비결이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것이 축복이다 (히13:5).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결코 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생활을 위해서는 방해하는 원수들을 제대로 알고 제거해야 한다.

 

둘째로, 만족하는 생활의 비밀은 무엇인가?  The Secrets of Contentment

1) 만족하는 생활의 비밀은 감사의 태도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만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만족의 비결은 감사에 있다. 감사하면 만족하게 된다. 만족하려면 감사의 말, 감사의 기도, 감사의 마음, 감사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감사의 능력은 (가) 마음의 변화를 준다. 감사하면 기쁨이 임하고, 또한 만족이 임한다. 갑자기 행복해 진다. (나) 감사의 능력은 환경의 변화를 준다. 감사하면 감사의 조건들이 더 생긴다. 감사하면 문제가 풀린다. 감사하면 막힌 것들이 해결되기 시작한다. 감사하면 더 큰 축복이 임한다. 문제해결을 원하는가? 감사부터 하라! 주님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기 전에 감사부터 하셨다. 우리는 문제해결이 되면 감사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문제해결 전에 감사를 드렸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열린다!  2) 만족하는 생활의 비밀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즐겁게 하려는데 있다 (마6:33). 바울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다. 이것은 단순한 Positive Thinking이 아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예수 안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가난을 견디고, 핍박도 견디고, 역경도 이길 수 있었다.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가?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에 온다. 주님이 기쁘시면 내가 기쁘다. 주님이 만족하시면 나도 만족하게 된다. 나의 감정의 근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으면 내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끝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했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와 사울의 공격 속에 살아갔다. 그래도 떳떳했다. 목동인 그가 부른 노래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만족의 찬가이다 (시23:1).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게 만들어 주신다. 3)만족하는 생활의 비결은 교회와 사람을 사랑하고 관심을 보이는데 있다 (4:10). 빌립보 교회는바울에게 헌금을 여러차례 보낸다. 바울이 성도들의 헌금을 기뻐하는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의 과실이 풍성함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 바울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직접으로 유익한 사람은 헌금한 성도들이다. 헌금은19절의 말씀 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심을 믿기 때문에 한다. 그리고 헌금하면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만족한 생활을 살게 한다.

 

나는 만족한 생활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고 예수 안에서 만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우기를 소원한다.

 


 

10/30/2011              주여 원하시면                    마태복음 8:1-4

 

더 내려갈 수도 없는 가장 밑바닥의 버림 받은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역사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절망적인 문제를 해결받는가? 주여 원하시면 기도와 순종이다. 

 

첫째로, 주여 원하시면의 기도는 주님께 나오는 기도이다.

처음 강조는 주님! 이라는 고백이다. 본문의 1)문둥병자는 가장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나아왔다.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주님께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받아주신다. 예수님께 나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사실 문둥병자는 예배도, 공중의 모임도, 사람들에게도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왔다. 믿음은 어떤 어려움이든지 극복하고 주님께 나오게 한다. 2)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예배한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서 절했다. 예배 드리는 것이 축복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대처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믿음이다. 그는 불평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망대신에 예배를 선택했다. 문둥병으로 전신이 썩어가는 모습으로 나왔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예배의 시작이다. 3)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보고 주여 하는 말은 중요한 고백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는 고백이다. 4) 문둥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이라고 간구했다. 이것이 참 기도의 모습이다. 기도는 내 소원을 고집하고 주장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소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믿음을 소유하자.

 

둘째로, 주여 원하시면의 기도는 깨끗게해 주시라는 기도이다.

그는 문둥병자이었다. 그런데 ‘낫기를 원합니다’ 아닌 ‘깨끗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다. 물론 병고침을 받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병고침 이상을 구하고 있다. 깨끗게 됨은 정결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전에 나가고, 교제하고, 천국을 가기를 원하였다. 병낫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은 깨끗게 됨이다. 세상의 복 받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영적의 복, 영원한 복, 영생의 복 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공관복음 중 의사인 누가는 그의 병세를 최악으로 표현한다. 문둥병 말기의 환자이었다 (눅5:12). 이제는 고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상징한다.  온 몸에 병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것이 바로 나의 영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의 댓가는 사망이다 (롬3:23, 롬 6:23). 문둥병이 갖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1) 문둥병은 무감각하게 만든다. 문둥병의 증상은 감각을 잃는 것이다. 죄의 증상은 영적인 무감각이다. 2) 죄는 죄를 사랑하게 만든다. 3) 죄인끼리 좋아한다. 함께 죄를 짓고자 한다. 4) 문둥병과 죄는 격리하게 만든다. 죄는 하나님과 분리를, 사람과의 분리를 낳는다. 주님은 문둥병을 고치실 수 있는 것 처럼, 우리의 영적 문둥병도 능히 깨끗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셋째로, 주여 원하시면의 기도는 자신을 향한 구체적인 적용이 있는 기도이다.

마지막 강조는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다. 참 믿음의 적용은 먼저 ‘주님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이다. 먼저 내가 고침 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 문둥병자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 드릴 수 없다. 도리어 가장 존귀하고 깨끗한 것도 문둥병자의 손에 닿기만 하면 부정해 진다. 우리의 의도 마찬가지. 죄인이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만한 능력과 힘과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1)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미신다. 주님은 언제나 죽음의 상태인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신다.  2) 예수님은 문둥병자을 어루만지신다. 문둥병자가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되고, 또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어도 부정하게 된다. 일주일 동안 진 밖에서 살고 깨끗게 한 다음에 들어와야 한다. 모두 피한다. 주님은 만질 수 없는 죄인을 만지신다. 그리고 고쳐주신다. 3) 내가 원하노니의 축복을 주신다. 나의 치유를 원하시는 주님은 나의 최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4)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병에서 자유롭게 하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깨끗하여짐을 확인 받아야 회복이 된다. 집에도, 사회생활도, 성전에도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회복과 치유를 주신다.

 

문둥병자가 누린 축복은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누릴 축복이다.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확신하고 내 삶을 주님께 드리자! 그럴때에 내가 원하노니의 응답을 주신다.


 

10/23/2011          두 건축자들            마태복음 7:24-27

 

인생은 자기의 전 생애를 거쳐서 인생을 건축하는 건축자이다. 나는 어떤 집을 짓고 있는가?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두 건축자를 비교하시면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라고 명하신다.

 

첫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있는데 지혜로운 건축자는 듣고 행하는 사람이다.

듣는 것과 행하는 사이의 연결성은 극히 중요하다. 하나님께 사용받는 제사장은 귀와 손과 발이 정결해야 한다 (레위기 8:24). 주님은 듣는자로 끝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 하신다 (약1:22-25).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서 의사의 이야기만 듣고 그의 처방이나 진단을 따르지 않기로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건축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뒤집지 않는 빵과도 같다. 한쪽은 시커멓게 타고 먹을 수도 없는데, 한 쪽은 하나도 익지 않은 설어 있는 빵이다. 양쪽 중에 어느 부분도 취할 수 없다.

 

둘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차이는 그 기초에 있다.

두종류의 기초가 있다. (1) 모래 위의 집 (2) 반석위의 집이 있다. 집은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먼저 신앙의 실천이 기초이다. 순종이 기초이다. 순종이 차이를 낳는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고백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 있지 않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데 있다. 두 종류의 삶이 있고, 두 종류의 집이 있고, 두 종류의 기초가 있고,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마침/ 두 종류의 결과가 있다. 보통 때에는 기초가 문제인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기가 올 때에 차이가 난다. 본문에 보면, 시험이 오는데 삼중의 시험이 왔다. 지혜로움을 보통 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비가 오고, 홍수가 내리고, 바람이 불 때에 말씀을 듣고 순종함의 지혜로움이 나타난다.

 

셋째로 두 건축자의 건축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갖느다.

시험은 반석 위에 세운 집에도, 모래 위에 세운 집에도 왔다. 똑같은 비이지만, 똑같은 홍수이지만, 똑같은 바람이지만 마지막이 다르다. 여기서 issue 는 반석위에 세우면 폭풍이나, 비나 바람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꿋꿋하게 생존할 수 있는가? 살아 남을 수 있는가? 흔들리지 않고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다. 모래 위, 즉 계절천 와디에 세워진 집은 비와 홍수와 바람을 이길 수 없다. 기초가 없기에 쓸려 내려간다. 반석 위에 세우지 않는 것은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석 위에 세우지 않는 것은 더 힘들다. 더 비싸다. 다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일상시에는 다 잘 사는 것 같음. 다 강한 것 같음. 갑자기 닥힐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멸망의 심판을 당한다. 좁은 문과 넓은 물, 순종과 불순종,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생명과 멸망의 차이로 나타난다.

 

인생을 사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반석과 모래, 행함과 행하지 않는 것, 하지만 결과는 무너지지 않음과 무너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여기서 우리가 집을 지어야 할 반석이 무엇인가? 순종의 생활이다. 하지만 진정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굳건한 반석(고전 10:4), 하나님이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 (벧전 2:6), 오직 하나의 터 (고전 3:11), 모퉁이 돌이시다 (엡2:20).

 

어떤 기초에 집을 짓는가 하는 문제는 회복할 수 없는 실수를 야기한다. 만약에 비가 온다면, 만약에 홍수가 난다면, 만약에 바람이 분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시작하시지 못하였다면 지금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 위에 인생을 짓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이다.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 인생을 건축하자. 이 땅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인생을 살 것이며,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10/16/2011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            마태복음 7:15-23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고 우리의 소원이다.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

 

첫째로,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에서 실천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라 하신다. 거짓 선지자란? 참 선지자의 반대이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사람이다. 하지만 거짓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 하는 자칭 선지자이다. 여호와 말씀 아닌데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 라고 주장한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하는 가짜 선지자 이다. 이들은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자로 성도들을 미혹한다. 구약이나 신약에 계속 존재했다. 주님은 마지막 시대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셨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확실하게 나타난 거짓선지자들이 있다. 이단들이다. 하지만 또 넓은 길 가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 듣기 좋은 소리,  듣고 싶은 소리 하는 사람들, 부담되거나 힘들지 않은 말을 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온다. 위장의 명수이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이리이다.  어떻게 거짓 선지자를 판단하는가? 주님은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라 하신다 (16, 20절).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한다 (16절).

주님이 보시는 나무는 두종류가 있다. 1) 무익한 식물이다. 가시나무나 엉겅퀴이다. 이것들은 에덴의 인간의 타락 이후에 땅에 저주를 받아 생긴 식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땀을 흘리게하는 것들이다 (창3:18-19). 가시에는 포도가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다. 2) 또한 유익한 식물이 있다. 포도와 무화과이다. 포도와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볼 수 있다. 하나님 보실 때에 우리는 유익한 존재들이다. 포도와 무화과는 단맛이 나는 열매들로 기쁨을 준다. 거짓선지자들이 맺는 열매는 어떠한가? 21-23은 더 shocking 한 말씀을 하신다 그들은 (1)  병을 고치고 (2)선지자 노릇하고 (3)귀신을  쫓아내고 (4)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정도면 좋은 사역자가 아닌가? 하지만 주님의 좋은 나무에 대한 판단은 다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 아니라 하신다. 이들은 믿은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주님을 향한 사랑도 믿음도 없다. 이들은 좋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신다. 천국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주님의 말씀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지만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는 말씀이다. 사랑이 결여된 행위는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

 

셋째로,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방법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늘 충만하여 순종해야 한다.

예수 없는 인생은 좋은 나무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 모신 인생은 좋은 나무가 되었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다. 타락한 인생은 좋은 나무가 없다. 과거 우리는 떫은 감/ 돌감람나무 같은 인생이었다. 현재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감람나무가 되었다. 유일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좋은 나무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인 인생이다.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을 말씀하신다 (요15장). 좋은 열매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다. 예수의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많은 맺는다. 풍성하게 맺는다. 따라서 포도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붙어 있어야 한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 가지가 열매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잘 붙어 있는 것이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인생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된다.


 

10/09/201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13-14

 

인생은 수많은 선택 속에서 결정하면서 산다. 본문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선택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주님은 좁은 문을 선택하라 명하신다.

 

첫째로, 인생에는 두개의 길이 있는데 넓은 길과 좁은 길이다.

먼저 넓은 길은 세상길을 상징한다. 넓은 길은 예수 없는 길, 예수 없는 세계, 예수 제외한 모든 것을 말한다.  죄를 즐기고 싶을 때는 넓은 마음이 된다. 넓은 길에는 울타리가 없다. 한계도 없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이길을 가기위하여 당신은 아무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오직 포용성과 허용성만이 허락되어 있다. 넓은 길은 쉬운 길이다. 어떤 행동이나 욕망을 수용하기에 비판받지 않는다. 왜 쉬운가? 따로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넓은 길은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든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하고 상처를 입히고 죽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좁은 길이 있다. 주님이 우리로 걸으라 명하시는 길이다. 여기에는 자기부인과 순종이 요구되는 길이다. 진실과 정직과 용서의 길이다. 이길은 어려운 길이다. 아니 불가능한 길이다. 좁은 길은 예수님이 없으면 결단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내가 이길을 걷고자 결심하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걸어 주시는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정말로 멋있고도 기쁨이 넘치는 행로로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결단코 혼자 걷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신 이미 이 땅 위에서 사셨던 길이다. 우리는 좁은 길을 선택한ㄷ나. 우리가 좁은 길을 택하는 이유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넓은 길과 좁은 길은 인생이 걷는 두개의 목적지를 말한다.

종착역이 어디인가? 넓은 길은 종착역은 멸망이다. 주님은 넓은 길의 마지막은 멸망이다 하셨다.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자유를 빼앗기는 길이다. 죄의 특징은 우리로 죄의 노예가 되게한다 (요8:34).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넓은 길의 마지막은 멸망이다 (딤후1:7-9). 영원한 멸망이다. 지옥이다. 불의 못이다 (계20:15; 21:8). 사라지지 않고, 죽지않는 영원한 고통이다. 하지만 좁은 길은 길이 어려우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 영생, 구원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영생을 주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릴 수 있는 영적 생명이다. 나는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가? 멸망의 길인가? 생명의 길인가?

 

셋째로, 넓은 길과 좁은 길은 두길을 가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넓은 길에는 멸망으로 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간다. 좁은길은 생명으로 가는데도 오직 소수의 무리들, 적은 사람들이 간다. 넓은 길은 걷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착각을 준다. 속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적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외로울 수 있다. 험한 길이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좁은 문을 찾는 자가 적다 (눅13:24). 슬픈일이다. 하지만 주님이 가신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대한 성도의 무리를 발견한다 (계7:9). 나는 어느길을 가는 사람인가?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인가? 좁은 길을 행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좁은 길로 걷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 열쇠는 문의 선택이다. 옛날 성문은 두개의 문이 있었다. 넓은 문과 좁은 문이다. 낮에는 넓은 문을 열어 놓는다. 마차도, 말도, 수레도 다 지나간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반면에 좁은 문이 있다. 밤이 되면 큰 넓은 문은 닫히고 도시의 안전을 위하여 좁은 문만 열어 놓는다. 소수의 사람이 가는 어려운 길이다. 협착한 문으로 입구가 좁은 문이다. 한 사람씩 지나가는 길이다.

 

좁은 문은 무슨 뜻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14:6). 예수님은 양의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회개함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오직 하나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문은 아직도 열린문이다. 아직 닫히지 않음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닫힐 때가 있다고 하신다. 주님의 요구는 간단하다. 좁은 길을 걸으라!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내가 그 끝에 영생을 주리라. 좁은 문을 택하라! 예수를 선택하라. 후회함이 없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하리라.  오늘의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10/02/2011          좋은 관계를 세웁시다 / 황금률                      마태복음 7:12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다. 좋은 관계를 세우는 방법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본문은 황금률이라고 불리우는데 좋은 관계를 세우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다. 

 첫째로, 좋은 관계를 잘 세우는 것이 성경의 중심 가르침이다.
본문은 산상보훈의 산봉우리의 최고봉과 같고,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Climax이다. 로마의 황제이었던
Alexander Severus 가 이 말씀을 금으로 자기의 벽에다가 새겨 놓았다. 황금률은 금에 새긴 계명이라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사람들의 실패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데로 남을 대접함은 좋은 관계를 세우는 마스터 키이다. 비슷한 교훈들과 비교될 수 없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계명이다. 예수님은 나의 사랑의 초점을 다른 사람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 성공적인 관계의 비결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 하신 말씀도 역시 황금율로 해석할 수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느데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부부관계의 원리이고, 부모 공경의 원리이고, 자녀를 양육하는 원리이고,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원리, 심지어는 신앙의 원리이기도 하다. 또한 황금율을 적용하는 상대에는 조건이 없다. 이 말씀 속에 성경의 실천의 핵심원리가 녹아져 있음. 

 둘째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축복의 약속이 있다!
여기에는 그러므로의 축복이 있다. 하지만 황금률 순종이 쉬어 보여도 실천하기 쉽지 않다. 왜 이렇게 어렵나? 죄 때문에 순종하기 어렵다. 자연인은 다른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 이 말씀의 순종은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결론으로 황금율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응답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것으로 주신다.”그러므로 대접받고자 하는데로 남을 대접하라 하신다. 왜 황금률을 기도와 연결하셨을까? 기도함과 황금율을 연결하신 비밀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길이고, 하나님과 튼튼한 관계를 세우면 이웃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해 진다는 말씀이다. 황금률은 은혜 grace의 기본이고, 구원의 기본이고, 사랑의 기본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우리를 대하시는 것과 관계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입장에 서 보신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나? (1) 생각에서, (2)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판단에서 (요7:24, 마7:1-5), (3)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나타나야 한다. 황금율의 말씀을 실천하기 어렵다 느낀다. 그러나 약속이 있는 말씀이다. 기도 응답의 약속하신 후, 그러므로의 약속을 주신 후에  믿고 한번 살아보라! 믿고 한번 순종해 보라 명령하신다. 

 셋째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데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예수 복음 안에서 가능하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말씀이다. 불가능하다. 이 말씀 순종이 가능한 유일한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풀린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임재에 젖으면, 순종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 성육신의 의미가 바로 황금율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대접하라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대접받을 수 없는 나를 먼저 대접해 주시려고 오셨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구원하셨다.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면 나도 황금율을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의 대접을 받았기에 그러므로 나는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실천할 말씀이다. 황금율은 모든 관계를 세우는 비밀이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남을 대접하자. 관계를 세우는 성경적인 비결이다.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세우고 최고의 인생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한다.

 
09/25/2011       지속적인 기도      마태복음 7:7-11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임에도 성도들의 활동에서 가장 부족한 것 중에 하나이다
. 그래서 주님은 기도는 강도를 더하가는 기도, 포기하지 않은 기도, 지속적인 기도를 하라고 명하신다. 

 
첫째로,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7:7-8).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꺼리시거나 아까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를 원하신다. 기도하기를 기다리시고, 반기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기도의 태도를 보여주신다. 기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2)하나님은 진지한 기도를 응답하신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심각한 기도이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응답하신다. 3) 하나님은 강도를 높이는 기도를 기뻐하신다. 기도는 행동이 점점 강하여지는 것이다. 기도는 명령이다. 지속적으로 구하고, 지속적으로 찾고, 지속적으로 두들려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기도인가? 기도의 3박자 단계가 필요하다. (1)단계1: 지속적으로 구하라. 구함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채워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2)단계2: 지속적으로 찾으라. 구하는 것을 손에 얻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3)단계3: 지속적으로 두드리라.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 손에 얻으려는 행동이다. 믿음으로 바라며 기다림이다. 두드릴 때는 한번 이상 한다. 계속해서 두드린다. 열릴 때 까지 두드린다. 

 
둘째로,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우리의 기도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존귀하게 받으신다. 그것은 구하는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1)우리의 일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나오기를 원하시고, 나아갈 길과 방법을 열어 주셨다. 우리를 가족관계를 만들어 주신다. (2)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기도가 없다. (3)기도의 응답이 시간이 걸릴 때에 점점 더 기도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기도는 응답 받을 때까지 하는 기도이다. 보통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에  포기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하지만 주님은 응답되지 않을 때에 기도의 강도의 증가하라, 방법이 더 적극적으로 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에는 약속이 있다. 기도에는 결과가 있다. (1) 주시고, (2) 찾고, (3)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3가지 동사 모두 미래형이다. 열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나의 기도의 수준은 신앙의 수준이 된다. 주님의 강조는 무엇인가? 기도하면 반드시 들으신다. 너희의 기도는 존귀하다. 그러니 제발 기도 생활을 해라! 우리 인생의 문제는 기도하지 않아서 생긴다. 어찌 기도하지 않으랴! 

 
셋째로, 지속적인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는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11).
기도의 대상은 우리가 구할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관계 속에서 응답하신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들에게 적절한 것을 주시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지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심을 확신하라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좋은것으로 응답하신다. (1)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해 주신다. 기도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나는 기회이다.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축복하신다. (2)하나님 아버지는 각사람에게 주신다.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돌보심을 보여 주신다. 때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 물론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주신 것이 나의 삶에 가장 좋은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좋은 것 주심을 믿을 때에, 좋은 것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 나의 상처, 아픔, 실패, 눈물도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은 다양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눅11:13).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분이시다. 바로 성령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님은 지속적인 기도, 강도를 높이는 기도의 세계로 초청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나의 이번 주간의 생활이 어떻게 달려져야 할까?

 
08/14/2011         어찌 찬양 안할까!                    마태복음 6:13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송영으로 끝난다. 송영은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여 드리는 찬양의 기도이다. 기도의 마지막이 왜 송영인가?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찬양의 이유는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다.
송영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왜 기도의 마지막에 송영을 하도록 가르쳐 주셨나?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함을 가르쳐 주신다. 또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한다. 그래서 주기도의 시작도 아버지로, 끝도 아버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기 원하시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능력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는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난다. 어떻게 찬양을 잘 드릴까? 하나님을 경험하면 찬양이 열린다.
 나라가 영원히 당신께 있습니다 라는 말은 1) 아버지 당신은 왕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다 가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왕이시다. 주님은 어떤 왕이신가? 성경은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하다. 역사의 왕, 열방의 왕, 유대인의 왕, 이방인의 왕, 영광의 왕, 만왕의 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왕국, 우주적인 왕국이고, 영원한 왕국이다. 2) 또한 우리는 당신의 종이고 백성 입니다 라는 고백이다. 3종류의 백성이 있다. 반역하는 백성, 뜨뜻 미지근한 백성, 순종하는 백성이 있다. 나는 어떤 백성인가?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우리는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이다. 어찌 찬양 안할까?
 둘째로, 찬양의 이유는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세는 크신 권세이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권세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가 영원하시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마28:18). 주님의 권세는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권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누리는 권세이며,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권세이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 성령님의 함께하심으로 누리는 권능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권세는 예수님의 권세이요, 예수님의 권세는 위임된 권세이요, 나의 권세이고, 이 땅에서 누릴 권세이고, 영원한 권세이다. 어찌 찬양 안할까?
 셋째로, 찬양의 이유는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데 범죄한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롬3:23). 하나님의 뜻은 인생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됨은 아버지께 영광이요,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아버지께 영광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에도 (출40:33-34), 솔로몬의 성전에도 (대하5:4),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도 (요1:14)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하나님의 전이다 (고전3:16). 우리가 살 영원한 나라 새 예루살렘 (계21:1-3, 22-27) 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다. 세례 받으실 때에도, 변화산의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으로, 부활의 예수님으로, 승천하셨다. 마지막에 심판자로 다시 오실 재림주의 모습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다. 마지막에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끝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간구하는 모든 것 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고백이다. 주기도문은 아멘으로 기도를 마친다. 아멘이란 진실, 충성, 믿음이라는 뜻이다. 기도의 마지막에 아멘은 지금까지 드린 기도가 진실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의미이다.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는데 어찌 찬양 안할까?
 우리는 찬양할 이유가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다.

 
07/17/2011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9-13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 주님은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 그 첫번째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간구이다. 
 
첫째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 이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실증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심지어는 원수에게도 주신다. 하물며 자녀인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 아버지께 주옵소서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시라는 고백 속에서 드리는 것이다. 매일의 양식도 (잠30:8), 매일의 건강도 (시6:2), 매일의 생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1)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할 때에는 차이가 있다. (가) 영적인 것을 구할 때에는 절대적으로 구해야 한다. 거절 당하여서는 안된다. 생명을 걸고 구하고 결단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영적인 축복은 사모하고 또 사모하여, 구하고 또 구하여 반드시 받아야 한다. 야곱은 인간적이지만 영적인 축복에 대한 절대적인 갈망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귀하게 여기심이 믿음이다. (나)반면에, 육적인 것을 구할 때에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육적인 것을 ‘무조건 주십시오’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 원하시면 주십시오” 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또한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서 현세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우리의 문제는 육적인 것을 갈망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 처럼 추구하는 데에 있다. 팟죽이 장자권보다 더 중요하고, 영적인 축복이 육신의 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2)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의 기도는 ‘오늘의 음식’ 을 주옵소서 의 의미이다. 1개월, 1년치, 10년치, 아니 평생에 먹을 것을 한꺼번에 주십시오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 하루의 음식을 주옵소서의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1) 장래를 위하여 노심초사 고민 근심 걱정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6:3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만나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매일 우리를 먹여주신다. 만나를 매일 주신 것은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하는 훈련이었다. (2) 더나아가서 하루 하루를 마지막 처럼 살라는 뜻이다. 세네카의 말처럼 자연은 조금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조금 축복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조금은 그 시점의 우리에게 충분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높이는 것이다. 적은 일에 만족하는 것은 불만족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준다. 나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다. 하지만 적은 일에 감사하고 만족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늘 적은 일에 감사하셨다. 그리고 적은 것 대신에 영적인 복을 채워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결핍을 삼켜버린다. 십년의 양식이 있어서야만 감사가 나와서는 안된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에게 충분하다. 십년의 양식은 우리가 죽어서 가져갈 것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취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복된 삶이다. 
 
셋째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나를 위한 기도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주님은 공동체와 이웃을 생각하라 라고 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편협해 질 때가 많이 있다. 내가 가지면 다른 사람은 없어도 개의하지 않는다. 내가 입으면 다른 사람은 벗어도 상관이 없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사실 남을 위한 기도이다. 나를 통하여 우리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세요의 의미이다. 
오늘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은 행복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식이 그들에게도 미치도록 구체적으로 돕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의 실천입니다.

 

7/10/2011          뜻이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3

 

주기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은혜이고, 복이고, 유익이다.

 

첫째로, 기도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확신하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2)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 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이다. 거기에는 순종만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모두 하늘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고 최고이다. 그래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 하는 고백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의 차이가 있을 때가 있다. 기도는 나의 뜻은 버리고 하나님을 뜻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벗어날 때가 있다. 성령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가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즉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돌아와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의 차이가 있다. 다른 종교는 자기의 뜻과 소원을 관철하려고 기도한다. 기복신앙이다. 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기도이다. 나 자신의 주장과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을 사는 승리의 비결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의 기도이다.

1)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부리실 때에 제외없이 전부 참여한다 (히1:14). 하나님의 뜻이면 그대로 완전하게 이룬다 (민15:40, 행13:22, 시103:19). 천사들은 능력이 있어서 강력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다. 2)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거룩하게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완전치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 큰 죄이다. 3)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즐거움으로 순종되어진다. 4)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민첩하게 이루어진다. 5) 하나님의 뜻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지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지는 모습은 어떻게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려고 하는가?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한다. 순종에는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행하기 위하는 능동적인 순종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참을성있게 순응하는 수동적 순종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구원자이시다. 주인이시다.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의 충성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의 목적도 우리가 그의 뜻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인생 최고의 승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증진시킨다 (신10:13). 회개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사실 유익을 보는 것은 우리이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일에 있어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할 때에 아버지는 받으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차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가 도구로 내가 쓰임 받으려 하는 갈망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최대의 명예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쓰임받는 영광과 특권을 누리자.


 
7/3/2011           나라가 임하옵시고           마태복음 6:9-13 (v10)

 

 주기도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두번째 간구는 나라가 임하옵시고 이다. 당신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주옵소서 이다. 우주적인 기도이다. 오늘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첫째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기도이다.
한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왕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왕국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눅19:12,15). 이 나라는 나 중심적인 억지로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서 나의 유익을 구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요6:15). 성경은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신다. 열방을 치리하시는 온 땅의 왕이시다 (시47:7-8).  하나님은 어떤 왕이신가? (가) 위대한 왕이시다 (시96:3). 천지에 충만하시는 왕이시다. (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왕이시다 (시24:10). (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왕이시다. 진실하신 왕이시고, 거룩하신 왕이시며 우리 아버지 왕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크신 왕을 섬기는 것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위대한 왕을  왕으로 섬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먼저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세상 나라가 있음을 전제한다. 세상나라는 사단의 나라이다. 지금 우리는 어두움이 지배하고, 죄악이 판을 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온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요일 5:19). 이 세상은 악한 원수 마귀 안에 처한다. 따라서 마귀가 왕노릇한다. 마귀가 이끄는대로 산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 자랑에 노예가 된다. 사단 마귀는 세상을 탐욕과 죄와 사망으로 지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 왕국이다 (사9:6-7). 그는 평강의 왕이시다.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신다. 과연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아니면 세상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둘째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
죄악의 세상에 천국을 가져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세우려 오셨다 (마4:17).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주님은 오시자 마자 마귀의 일을 대적하시고, 마귀의 쇠사슬인 죄를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마귀의 군대인 귀신을 쫓아내신다. 병든 자를 고치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소망을 주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천국을 주신다. 마귀의 세계는 죄와 슬픔과 절망이다.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죄와 슬픔과 절망을 제거하신다. 주님은 용서와 기쁨과 소망을 주신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마귀의 나라를 타파하신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골2:15).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으면 마귀는 사람을 붙잡아 놓는 권세를 잃어 버린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도 무섭지 않다. 죽음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과정이 된다 (요14:1-3). 더 나아가서 이제는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이 땅에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주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다. 의의 나라이고 사랑과 거룩함의 나라인 것이다. 마귀는 탐욕과 죄와 사망을 가지고 다스렸지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다스리신다. 그래서 주님은 이 하늘나라를 우리 속에 임하게 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속 에서 사람에게 사람에게로 전파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으로 확장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하늘나라가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건강의 나라요, 하늘나라는 저주에서 해방된 나라요, 하늘나라는 천국영생을 약속있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고후 5:17).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마11:12). 어떻게 천국을 누릴 수 있을까? 천국은 기도로 소유한다. 천국은 믿음으로 차지한다. 순종의 삶이 하늘나라가 우리속에 깊이 임하게 한다. 하늘나라는 성령충만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넘쳐나게 된다. 천국은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확장되어진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늘나라를 우리 가운데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나라 안에 들어와 있다. 하늘나라가 우리 속에 지금 들어와서 있다. 주님과 동행으로 천국을 누리자. 그리고 천국을 이 땅에 확장하면서 살자.

 
6/26/201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
 
주기도문의 간구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로 시작한다. 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하셨을까?


첫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이름이심을 믿으라 하신다
.
사실 기도는 가장 중요한 기도이다.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첫 번째이면서도 우리의 모든 간구의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름을 중하게 여기셨다.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이름도 고쳐주셨다. 최고의 축복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름의 축복을 누린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한 이름이시다. 이름 가운데 명성을 가지신다. 자신의 존재를 이름에 담아서 체험케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하신다. 본문의 기도는 제1계명과, 제3계명을 긍정적으로 바꾼 것과 같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입으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떠나지 않았는가 (사 29:13) 회개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높여 드리자.

둘째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는 분은 결단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이시다. 1)이 기도는 우리가 드릴 모든 기도의 처음 기도이며 마지막 기도와도 같다. 마치 과녁을 통과하는 총알과도 같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함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초점 맞추어야 한다. 처음 기도가 하나님 영광을 구함으로 시작하고, 기도의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기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나야 한다.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가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된다. 나라의 임하심도, 뜻이 이루어짐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마지막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이다. 천국에서는 일용할 것이 필요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도 계속하여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필요하다. 이사야의 환상도, 요한의 환상도 하나님의 보좌의 궁극적인 기도와 찬양이 거룩하심에 있음을 증거한다 (사6장, 계4:8). 2)또한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와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 그리고 감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다윗의 용맹과 승리와 겸손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는 충성이었다.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다윗을 다시 높여 주신다. 3)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기도는 기도의 담력을 준다 (딤전3:13). 능력있는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강력한 능력과 응답을 얻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자. 그의 이름을 높이자.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의 본질이고 기도의 특권이다.

셋째는, 이기도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살도록 해 달라는 간구이다
.
우리가 바르게 살고 믿음으로 살게해 주시라는 간구는 우리의 소원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거룩히 여김을 받게되어져 있다. 우리가 거룩히 여기든지 말든지 관계없다. 태양은 우리와 관계없이 빛과 열을 발산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원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양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들이다. 자녀가 잘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는다. 하나님의 아들 딸인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모독을 받게 된다 (롬2:24).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결단하면 우리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날마다 주 위해 살리!의 생활이다. 주님을 위한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고백과 찬양도, 우리의 고통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하나님을 거룩히 여김 받으신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일 때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기도의 타겟이고, 목적이다. 이 기도로 보좌가 열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의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자!


 
6/12/20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13

예수님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게 하셨다
. 이 부름 속에서 기도의 대상과 기도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신다.
첫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로 불렀다 (창14).  2) 구약에서도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솔로몬의 봉헌 기도 (왕상 8장. 대하6장)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믿고 고백한다. 에스라(5:12), 시편, 예레미아, 다니엘 역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증거했다.  이 이름은 특별히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신 하나님 호칭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만 14번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했다.  천부는 5회나 사용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1)하나님의 편재성과 2)하나님의 무한성, 3)하나님이 창조주 이심, 4)그리고 만물의 통치자 이심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것은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과 광활하심을 바라보아야 함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감동으로 시작하기를 원하신다. 다른 어떤 존재나 세상의 신에 비교할 수 없는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둘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수 있는 전능자 아버지 이시다
.
주님이 기도의 시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올라간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늘에 보좌가 있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앞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향이 가득한 금대접에 담기어서 보좌 앞 아버지께 드려진다. 기도가 너무도 귀하다. 기도가 금그릇에 담길 정도로 가치있게 취급하신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간다 (5:8). 요한계시록8장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 앞 금단에 드려진다고 했다 (8:3-4).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심판을 행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세상의 아버지와 다르시다. 세상의 아버지는 연약하고 부족하다. 무기력하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능력자 권능자 이시다. 자녀의 문제들을 대신 감당하고 책임져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인간과 우주의 최고의 권능을 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다 보신다. 다 아신다. 다 아버지의 손에 있다. 우리가 땅을 보고, 문제를 보고,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다.

셋째로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로 담대히 기도할 것을 원하신다.
사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말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 거룩하시고 능력 많으신 분이 어떻게 죄인인 나와 함께 할 수 있는가?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나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향하신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신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그 초월하신 그 분에게 직접 기도할 수 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들은 만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로 나갈 수 있다. 하늘의 계신 아버지의 은혜는 기도할 때의 우리의 자세를 바로 잡아준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1) 순종하는 자세로 기도드린다. 아버님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다. 2)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기도드린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존경을 마음껏 나타낸다. 3)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응답하심을 믿음으로 나간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4)하나님 아버지의 응답하심을 믿음으로 나간다. 세상에 모든 길은 다 막혔어도 하늘을 향한 문은 항상 열려 있다. 하나님의 편재성 때문에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다
. 하나님의 전능성 때문에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어떤 형편에 있어도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때문에 무슨 이유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보장되었는데 왜 기도하지 않는가? 왜 은혜의 장소로 나가지 않는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열린 대로가 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6/5/2011            우리 아버지            본문: 마태복음 6:5-10

 


신앙생활을 흥미있고 기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 아버지 신앙이 승리의 생활을 하는 능력의 열쇠이다. 우리 아버지 속에 감추어주신 은혜는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복음서에서만도 70여회 이상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 본문에도‘너희 아버지’가 10번이나 반복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아버지 한마디로 집중한다. 기도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말하고 듣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1) 우리 아버지는 사랑의 관계 설명한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아주신다. 2) 또한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아버지는 우리의 함께함을 기다리신다. 3)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는 지속적이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음이 신앙의 핵심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되심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설정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되심은 획기적 계시이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영을 받았고 (롬8:15), 아들이기 때문이다 (갈 4:6). 우리의 신앙생활의 질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 결정된다. 다른 종교는 신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성도는 관계 위에서 시작하는 기도이다. 관계가 성립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그 아버지께 기도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의 기도이다. 아버지에게 드리지 않는 기도는 모두 외식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라는 칭호는 가족의 언어이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 아버지 라는 칭호는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사탄의 3가지 방해공작이 있다. 1)사단은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연상시켜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아주 파괴적 일 수 있다. 아버지들을 무너 뜨림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 같지 않다. 너무도 좋으신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2)사단은 우리의 언어의 한계를 통계하여 우리를 벙어리로 만든다. 우리의 말이 막히게 하고, 우리의 혀가 굳게한다. 기도가 안되는 벙어리병을 어떻게 고치는가?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요1:12). 믿어서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다. 3)사단은 우리로 죄를 짓게하여 기도하지 못하게한다. 죄를 지으면 기도가 막힌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 기도가 열린다. 기도는 나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공로에 의지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름은 수직적인 관계가 세워진다.

 

셋째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설정시켜준다.

진정한 축복은 ‘나’ 가 아닌 ‘우리’에 있다. 주기도문에서 강조도 ‘나’ 가 아니라 ‘우리’이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된다. 피조물과 자녀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오직 주의 피로 사신 자녀들만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를 믿게되는 것은 개인이 자기 믿음가지고 구원을 받지만, 믿고난 다음에는 달라진다. 우리의 관계로 나간다. 예수를 믿는 것은 team sports와 같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다 다 연결이 되어서 예수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의 기도로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은 함께 자라가야 한다. 지체가 심히 아프거나 힘들게 되면 그 영향은 온 공동체에 퍼진다. 주기도는 ‘나’ 만이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 모두 튼튼하게 세워져 나가는 기도이고,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우리의 기도이다. 공동체의 기도이다. 함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께 연결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고 승리의 비결이다. 우리 아버지로 믿고 헌신하자!

 


     
05/15/2011                 경건한 어머니                디도서 2:3-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어머니 이다.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명은 경건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경건한 어머니의 생활은 경건한 다음 세대를 낳은 최고의 비결이다. 
 
첫째는, 경건한 어머니는 남편을 사랑한다.
현대문화는 개인의 행복에 큰 가치를 둔다. 자기 성취, 자기 행복에 도취 되어서 산다. 가정보다 성취가 더 귀하다. 바울은 가정 중요성을 알고 아버지와 어머니 역활을 강조한다. 어머니의 생활은 부담이나 짐이 아니라 사역이다. 거룩한 사역이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예수님의 사랑의 모범을 보임은 너무도 고귀한 사명이다. 디도는 그레데 섬에서 사역을 했다. 그들은 난폭하고 부정직하고 부도덕으로 사역을 했다 (딛1:12-13). 악한 세상에 사는 여성들에게 선하고 거룩하게 살라 권면한다. 주님은 경건한 아내의 생활은 남편을 사랑하는 생활이라 하셨다 (엡 5:22-33). 세속적인 사회는 개인의 행복을 모든 우선 순위 위에 둔다.  경건하지 않은 세상을 거스리는 것을 교육하는 최고의 방법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룩한 아내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남편을 사랑한다. 우리가 결혼 서약을 할 때에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후에는 당신의 선택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남편이 완전하여서가 아니다. 성경적 사랑은 불완전한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이다. 하나님의 헌신이 그러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희생적 사랑이다. 
 
둘째로, 경건한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한다 (4절)
사람들은 자녀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되었음에도 자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다. 자녀들이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을 주는 것, 세상을 따라가게 하는 것들은 자녀사랑이 아니다. 성경적 자녀 사랑이란? 경건한 어머니는 자녀들을 훈계한다(잠23:13-14). 그래서 자녀들에 대한 훈련이나 징계는 사랑의 표시이다. 현대는 자녀들의 눈치보는 시대이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눈치 보고, 집에 오면 부모들이  자녀들의 눈치 본다. 훈계와 교훈이 없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녀들에게 성경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해야한다. 또한 그들의 영적, 감정적, 신체적 필요를 돌보아 준다. 자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축복이다.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훈계하거나, 징계 할 때에 사랑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잠3:12). 
 
셋째로 경건한 어머니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계발한다.
1)경건한 어머니는 자신을 잘 통제한다. 그레데인들 절제하지 못한다. 통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경건한 어머니는 성령 충만한 생활의 열매로 절제한다. 2) 경건한 어머니는 순결하다. 순결은 결혼의 서약에 대한 헌신이다.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정숙하고, 겸손하고, 마음이 순결하다. 외모도 순결하고, 말도 순결하고, 관계에서도 순결해야한다. 이것이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3)경건한 어머니는 가정 일을 한다 (5절). 디도는 직장생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가정이 우선순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가정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창조되었다. 세상에는 가정에서 하는 일 보다 더 큰 일이나 책임이나 특권은 없다. 4) 경건한 어머니는 친절하다. 5) 경건한 어머니는 남편에게 순복한다. 남편은 머리이지만 권세가 아니다. 사랑의 돌봄의 리더이다 (John Stott). 사랑과 서로의 존경이 있는 가정은 부인의 순복에 문제가 없다. 섬김으로 머리됨을 보여야한다. 예수님께서 같은 방법으로 교회의 머리됨을 나타내셨다. 이런 것들은 성도가 세상과 또한 세상의 문화와 다른 모습이다. 경건한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존귀하심이 나타난다. 영광을 받으신다. 
 
경건한 어머니는 세상의 소망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가정을 이룬다. 경건한 자녀를 양육한다. 경건하지 못한 세상에서 경건한 어머니는 세상의 소망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된다. 경건한 어머니가 되어서 경건한 자손을 세우는 주님의 은총을 축복한다.

 

01/02/2011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4:1-8)

2011년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이다. 금년의 성구이고, 우리의 사명이고, 목표이다.

첫째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최고의 비전이고, 우리의 최고의 가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셨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소유하고 말씀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대의 소망이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나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이외에 다른 옵션을 갖지 않으셨다. 우리를 기대하신다. 전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고 존재의 이유이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고 유언적 명령이다.  바울은 강조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너는 디모데이다. 다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해도 너는, 다른 사람은 무슨일을 하던지 너는, 다른 사람은 보지말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이 말씀을 듣는 너이다!  바울의 명령은 비장하다 (2절).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히 명하는 명령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심판주와 재림주이신 그리스도 앞이다. 엄중하게 명하는 말씀은 다른 사람은 관계하지말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하신다. 내가 그만큼 중요하다.

둘째로 증거할 내용은 말씀이다.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초점은 말씀이다. 나를 보십시오 광고가 아니다. 나를 보라고 하면 우리는 자신을 잃는다. 감히 나를 보고 예수 믿으세요하면 좋겠지만 자신감이 없다. 전도에서 우리는 다른 거지에게 양식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는 한 거지의 역활이다. 예수님은 이미 증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능력, 최고의 stuff이다. 그래서 말씀전파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파하라 하셨다. 때를 얻어도 때를 얻지 못해도, 기회가 있든지 기회가 없든지, 상대가 준비되었든지 준비되지 않았든지, 전하고 싶든지 전하고 싶지 않던지, 상대가 가치가 있어 보이든지 가치가 없어 보이든지 관계없다. 오직 말씀을 전파할 뿐이다. 항상 힘쓰라 하셨다. 군인이 완전무장을 하고 준비되어 언제,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수행하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힘쓰라는 말은 끈질기게 권고하라 는 뜻이다. 심한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항상 끊임없이 말씀을 전하라. 우리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최고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나의 사명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증거와 영혼구원에는 차이가 있다. 증거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다. 전파의 실패는 없다. 우리는 전파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때가 아직 아니든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방법으로 일하게 하실 것이다. 맡기고 최선을 다해서 전파하면 된다. 전도는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쓰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영혼구원의 수단이지 주체가 아니다. 전도는 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 안에게 들어가면된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한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파하는 것은 나의 눈의 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시간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한가지 기억할 말씀은 말씀 전파를 위해 인내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절).


새해는 지금까지 경험한 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우리의 비전과 사명인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자!


 
12/26/2010             예수님의 재림

성경의 약속 중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은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 후에 아버지께로 갈 것이고 다시 재림하여 오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예수님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이다. Dr. Jones는 성경을 요약하기를 창세기-말라기의 요약은 “예수님이 오신다” 이다. 마태복음 부터 요한 복음는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이다. 그리고 나머지 나머지 23권의 신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를 증거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 없다. 한번 말씀하셔도 이루어지는 재림에 대한 약속은 엄청나다.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은 469회 정도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재림의 약속은 1560여회 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318회이다. 이것은 신약의 매25절마다 한번씩 재림의 약속이 있는 셈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것 처럼 반드시 다시 오신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서 두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밤에 오는 도적같이 온다 (살전5:2).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이 된다. 그리워하고 기대하게 된다. 재림후에는 놀라운 은총과 복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천국이 임하고, 영생을 누리고, 주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담과 괴로움이 된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그런 척할 수 있다. 군중 속에 섞이면서,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가면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게되면 혼자 선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 대한 대답을 드려야 한다. 나의 인생의 결정들,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해야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을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각각 준비해야 한다.
왜 준비해야만 하는가? 1)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24:36). 내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되어야  또한 다른 사람들이 준비되도록 도울수 있다. 2) 예수님의 재림은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오는 것 처럼 임하신다 (살전 5:1-4). 3) 또한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준비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쉽고 넓은 길을 선택한다. 그 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멸이다.
우리가 준비되든지 준비되지 않았던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들은 앞을 내다보고 기대하고 기다리여한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준비되어 있기를 원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날이지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주님의 재림의 날은 기쁨과 감격의 날이 될 것이다. 진실로 주님이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두렵고 떨리는 멸망의 날이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재림을 맞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새해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예수님을 당신의 주로, 당신의 구세주로 모셔야 한다. 이 주님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12/19/2010            예수님의 재림            ( 요14:1-3)

성경의 약속 중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은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 후에 아버지께로 갈 것이고 다시 재림하여 오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예수님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이다. Dr. Jones는 성경을 요약하기를 창세기-말라기의 요약은 “예수님이 오신다” 이다. 마태복음 부터 요한 복음는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이다. 그리고 나머지 나머지 23권의 신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를 증거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 없다. 한번 말씀하셔도 이루어지는 재림에 대한 약속은 엄청나다.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은 469회 정도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재림의 약속은 1560여회 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318회이다. 이것은 신약의 매25절마다 한번씩 재림의 약속이 있는 셈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것 처럼 반드시 다시 오신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서 두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밤에 오는 도적같이 온다 (살전5:2).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이 된다. 그리워하고 기대하게 된다. 재림후에는 놀라운 은총과 복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천국이 임하고, 영생을 누리고, 주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담과 괴로움이 된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그런 척할 수 있다. 군중 속에 섞이면서,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가면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게되면 혼자 선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 대한 대답을 드려야 한다. 나의 인생의 결정들,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해야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을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각각 준비해야 한다.
왜 준비해야만 하는가? 1)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24:36). 내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되어야  또한 다른 사람들이 준비되도록 도울수 있다. 2) 예수님의 재림은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오는 것 처럼 임하신다 (살전 5:1-4). 3) 또한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준비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쉽고 넓은 길을 선택한다. 그 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멸이다.
우리가 준비되든지 준비되지 않았던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들은 앞을 내다보고 기대하고 기다리여한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준비되어 있기를 원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날이지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주님의 재림의 날은 기쁨과 감격의 날이 될 것이다. 진실로 주님이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두렵고 떨리는 멸망의 날이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재림을 맞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새해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예수님을 당신의 주로, 당신의 구세주로 모셔야 한다. 이 주님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11/28/2010              하나님께 감사하라                  (엡 5:19-20, 살전 5:18)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우리의 교만이고, 비판적인 영이나 지속적인 불평, 그리고 우리의 부주의함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로 감사는 표현되어야만 한다. THANKSGIVING SHOULD BE EXPRESSED.
감사는 표현되어야 한다. 주님은 감사를 표현하는 한문둥병자를 축복하셨다. 감사할 때에 육신의 병도 낫고, 영혼도 구원을 받고, 평생 감사하며 살게 하신다. 감사는 표현될 때에 감사이다. 감사가 표현될 때에 더 큰 은혜를 주신다. 한스 셀리는 감사는 인간의 다른 어느 태도보다 더 긍정적인 감정 에네지를 만든다 라고 했다. 감사의 마음은 나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받게 만든다. 감사는 감사하는 사람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받는 사람들도 좋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신다. 감사는 주님을 높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감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가까히 나간다.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깝게 오심을 느낀다.
하지만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반대의 효과가 있다 (롬1:21).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다. 마음이 굳어진다. 교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의 감사는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의 감사가 확장되어질 때에 다음 3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1) 인생의 축복들을 감사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들이 무엇인가? 헤아려보자. 그냥 포괄적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말고, 하나 하나 이름을 들어서 감사해 보자. 우리의 감사가 확장될 것이다. 2) 더 나아가 인생의 어려움과 짐들을 감사하자.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하셨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통과하고 증거하는 말씀이었다. 고난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음은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실 수 있고 함께하심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의 감사는 기대되는 것이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우리의 인생이 바꾸어진다. 1) 우리의 감사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다. 아이는 감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라면서 감사를 배우게 된다. 2) 우리의 감사는 주는 성도의 표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하셨고, 계속적으로 일하고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입술의 감사 뿐만 아니라, 나의 가진 것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 3) 우리의 감사는 우리를 빛나는 성도로 만든다. 3)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빛나게 된다. 더이상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이 되지 않는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려움이 와도 어려움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한다.
우리의 남은 평생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11/21/2010             화평케하는 자의 복          (마5:1-12)

평화는 인류가 가장 오래 갈망하는 것이면서 아직도 성취가 먼 것 중에 하나이다. 시대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주님의 재림까지 계속 일어날 비극이다. 주님은 화평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을까? 세상에는 화평케하는 자peace maker 가 있는가 하면, 화평한 척 하는 Peace Faker가 있고, 화평을 깨는 Peace Breaker 가 있다. 사람들이 평화를 갈망함에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원적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이다. 죄로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지고, 자신과의 화평이 깨지고, 이웃과의 화평이 깨지고, 자연과의 조화도 깨어져 버린다. 화평이라는 말은 성경의 샬롬shalom 이다. 이것은 전적이고, 개인적이고, 전반적인 평안함과 번영을 말한다. 화평을 얻으려면 의로움 righteousness 을 얻어야한다. 화평은 하나님 앞에서 바를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으로 바른 관계 갖게 된다. 죄짓지 않은 아담은 하나님과 화평하여 교제하고 사랑을 체험한다. 하지만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고, 숨고, 도망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진 것이다.
화평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화평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증거하신다. 메시야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평화가 오고, 예수님의 십자가과 부활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하나님이 화평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화평케하는 자가 된다. 화평케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갈3:26).
하나님과 평화가 없을 때에 결단코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면 화평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 그럴때에 화평케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화평케하는 자의 생활은 어떠한가? 먼저 나 자신과의 화평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 화평케하는 자의 역활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에서 화평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화평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있다. 세상이 교회에 기대를 하고 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성도가 세상으로 나가서 화평함이 마치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처럼 살아야 한다 (롬12:18).
이세상은 화평케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 화평케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화평케하는 자들의 기도가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 예루살렘의 보시고 우시는 주님의 기도가 있다. 성도들의 기도는 화평을 가지고 온다. 이 지역과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화평케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스데반은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다.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그는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고 바울은 화평의 복음을 증거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다. 바울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화평케하는 성도의 삶을 산다. 화평케 하는 자는 세계를 바꾸는 사람들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화평케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서 행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같은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화평케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화평케 하는 일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유업을 받는다. 후사가 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유업을 함께 누리는 후사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 ‘너는 내 아들이라’ 하는 음성을 듣는 자가 진실로 복될 것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평화가 없는 이 시대에 화평케하는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 보이자.

 
11/14/2010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5:1-12)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폐하고 더러운 세상이다. 이사야의 증거처럼 사람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부패하였다. 청결한 마음이 아니라 두꺼운 마음, 굳은 마음을 좋아한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다.
먼저,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마음은 사고 의지들을 작용하는 마음인 mind 와 감정 정서를 뜻하는 마음인 heart 를 말한다. Martyn Lloyd-Jones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마음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성경의 모든 것이 마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중요한 표현은 다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 9:4),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22:37), 마음으로 믿고 (행8:37; 롬10:9-10), 마음으로 목적하고 (행11:23; 고후9:7), 마음으로 순종한다 (롬6:17-18). 마음이 인격의 좌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마음을 잘 다스림이 필요하다. 마음이 청결하다 뜻은 죄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란 의미도 아니고, 바깥을 깨끗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더구나 아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신구약 전체가 다루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이다 (겔 36:25-26). 새마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정결케 하셔서 청결한 마음을 주시고 (25), 새 영 (성령)을 주셔서 부드러운 마음 주신다 (26).
물론 청결하다 의미 속에 깨끗하다는 의미가 있다.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하지만, 청결하다는 의미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순물이 제거될 때까지 제련된 금과 같이 순수한 것이다. 구약은 혼합된 것은 다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레19:19). 이중적 마음을 품지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순수함이다. 어떻게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씻어서 제거하신다.
또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한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요구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청결함을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순결하신 분시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동기가 순전하고,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중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이중적인 마음은 영혼의 암과 같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큰 죄이고, 두 마음을 품고 키워 나갈 때에 나의 영혼을 삼켜 버린다. 한마음이 복되다. 1)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한마음이 복된 것이다. 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마음이 복되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진정 복되다. 3) 한 마음으로 평생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복되다.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은혜받고, 이곳에서 변화받아 자라고, 이곳에서 한 마음으로 충성하겠다 결심해 보라. 하나님께서 한 마음에 한량없는 은혜를 부으신다. 4)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주님의 일만 보이는 것이 축복이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집중되어진 마음이다. 집중할 때에 능력이 나타난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보는 은총을 받는다. 하나님을 본다는 뜻은 무엇일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1)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마지막 때에 부활해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릴 복이다. 충만하게 누릴 은혜이다 (시 17:15; 63:2, 욥19:26; 이사야 38:11) 2)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복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말씀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1) 하나님께 의하여 받아지고, 2)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 안의 교제함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인 관계로 아는 것이다 (요 7:52). 이중적인 축복이다. 장래의 복이고, 지금도 누리는 교제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보고 거하는 축복을 누릴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복을 누린다.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11/07/2010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1-12)

긍휼은 우리 시대에 가장 오해된 말 중에 하나이다. 긍휼히 여기면 손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의 비밀을 깨닫고 누리기를 소원한다.

첫째로,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에 긍휼히 여길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온유한 자와 맥을 같이한다. 히브어로 라함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 헤세드라는 단어는 상대 어려움 타결 위해 행동하는 구체적 도움 주는 모습을 말한다. 긍휼은 하나님 성품 이시다. 긍휼의 하나님은 죄 용서 (민14:18,19),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 (시106:7). 긍휼은 동정 이상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이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긍휼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셨다. 이것이 긍휼이다.

둘째로, 우리는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낸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생활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긍휼히 여김은 긍휼이 넘쳐흐르는 모습이다. 넘쳐 흐르는 긍휼을 받은 우리는 긍휼을 줄 수 있다. 긍휼히 여김은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고 축복이다.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하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타인의 처지를 자기 처지처럼 여기고 돕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골3:13. 약5:11)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긍휼히 여기는 생활을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보이게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매일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그분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더 풍성하게 체험하게 된다. 주님께서 먼저 헤세드 받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너도 긍휼을 보이라 하신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책망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긍휼히 여길 때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
긍휼은 성령의 열매이다. 긍휼히 여김은 영적인 인격적인 요소이다. 긍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다. 긍휼히 여기면 성령으로 사는 것 보여진다. 긍휼히 여김을 거부하면 내가 주장하는 생을 온 천하에 증거하는 셈이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생활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이 땅에서만 받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시점은 미래형이다. 물론 인간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근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계기가 되어진다. 또한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상은 가난한 사람, 이웃, 성도등 그 제한이 없다. 모든 대상에게, 모든 상황에서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내가 긍휼을 이웃에게 확대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확대되어 임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긍휼은 복음적이어야 한다. 최고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행3:1-10).
최고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다. 인생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긍휼은 주님의 성육신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셨다. 따라서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우리는 자기 확대의 역사를 누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나? 감사하자! 찬양하자! 내가 아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받지 못했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자! 복된 삶의 시작이다. 그리고 덮을 자를 덮어주고,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고, 잊어 버릴 것을 잊어 버리고,거부했던 사람을 받아 드리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향하여 사랑으로 나가자. 내가 먼저 손을 내어 밀자.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억하고 긍휼히 여기자!

 
10/31/20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사람의 가장 강렬한 욕망은 먹는 것과 목마른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다. 사람들은 배부른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주님은 의에 주리고, 의에 목마른 자가 복되다 하신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1) 육체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본능적이고 생물적인 것이다. 동물도 식물도 목마름과 배고픔에 대한 욕망이 있다. 2) 또한 정신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사람만이 갖는 것이다. 새로움과 지식을 추구한다. 고귀한 사상에 흠취하며 즐긴다. 3)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전에는 결단코 만족함이 없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된다. 주님이 복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굶주림을 느끼는 곳에 오라고 초청하신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건강한 자가 먹고 마시지 못하였을 때에 느끼는 생리적인 현상이다. 의란 무엇인가? 도덕적인 의가 있고, 정의와 공의가 있고, 궁극적인 의가 있다. 사람들은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데 푹 빠져 있지만 하나님의 의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보여주신다. 의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5번이나 나온다. 그중에 4번이 산상보훈에 나온다. 8복은 천국으로 둘러쌓여 있다. 첫번째가 천국이고, 마지막의 축복도 천국이다. 처음 4번째의 복이 의고, 마지막 8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다.
주님이 그렇게도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기를 원하시는 그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이다. 이 의를 어떻게 얻게 되는가? 의는 착한 일을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엡2:8-9).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이다. 은혜로 주시는 은혜이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의이다.
왜 주리고 목마름이 복이 되는가? 1)주리고 목마른 것은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열망이다. 2)주리고 목마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3)주리고 목마름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한다. 주리고 목마름은 만족을 얻을 때까지는 결단코 쉴 수 없게 하는 문제이다. 만약에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에 하나님은 저희를 배부르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어서 주리고 목말랐는데 바른 관계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기에 배부르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언제 배부르게 됩니까? 1)채워짐은 즉시로 온다 (롬5:1). 2)하나님은 현재에도 채워주신다 (시편 23:5). 3)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배부르게 하신다. 우리를 성화의 걸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