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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2010             시험을 이기려면

사단은 대적자이고 시험하는 자이다. 마귀는 비방 중상 적대자이다. 사단은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한 것 처럼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이김의 길을 열어주신다.

첫째로, 시험을 이기려면 사단과 사단의 시험을 알아야 한다.
적을 알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기 위함이고 예수님으로 범죄케 하려는 의도이다. 사단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공격하듯 우리를 공격한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1)유혹은 피할 수 없다 즉 시험은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리더 시험을 받는다. 성령 충만해도 유혹이 있다. 2)시험하는 자는 사단이다. 3절에 사단은 시험하는 자라고 했다. 3)또한 승리한 다음에도 시험이 올 수 있다. 엘리야의 갈멜산의 승리 후에 이세벨의 시험을 받는다. 4)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항상 약한 부분을 틈탄다. 5) 시험은 환경보다는 인격/성품과 관계된다. 마음과 관계된다. 환경을 핑계하지 말라. 마음을 잘 지키라. 시험이 올 때에 생각하라. 우리가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면 사단은 무너뜨리기 위해서 도전한다. 시험을 이기면 상승한다. 지면 주저 앉고 다시 다람쥐 챗바퀴를 시작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상승의 기회로, 더 큰 은혜로 인도하신다.
사단의 모든 시험의 실상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시험들이 여기에 다 이 범주에 포함된다. 아담의 시험이 무엇이었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니 선악과가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웠다. 요일2:16에서 이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하셨다. 1)육체의 정욕, 육신의 약점 이용한 시험이었다. 금식하여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돌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v3) 한다. 주님은 신8:3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2)이생의 자랑이다. 감정상 약점 or 정신적 허영을 이용한 시험이다. 말씀을 인용해서 유혹한다. 성전 위에서 뛰어 내리면 받아 주실 것이라고 했다. 주님은 말씀으로 이기신다.  3)안목의 정욕이다. 신앙적 문제, 종교적 약점을 이용하여 시험한다. 사단은 경배하라고 한다. 주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둘째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이 무엇인가?
주님의 이기심은 우리의 승리를 위함이다. 1) 주님은 사단의 시험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셨다. 주님은 성령에 충만하셨다 (마4:1; 막1:12).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 성령충만하신다. 우리는 광야에서 혼자 살 수 없듯이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 성령님은 사단을 하늘에서 땅으로 쫓아내신 분이다. 성령님은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지실 분이다. 성령님은 사단을 떨게할 자이시다. 이 성령님이 우리의 시험 중에 함께 하신다. 성령님의 도움을 잊지말라.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라. 2) 주님은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 주님은 사단의 시험을 말씀을 사용하여 이기셨다. 예수님은 사단과 논쟁하지도, 설득하지도, 능력으로 제압하지도 않으셨다. 사단의 속임수는 우리가 유혹을 받아도 이길수 있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유혹을 가볍게 여기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시험에 지는 것을 비웃으면서 나는 이길 수 있다고 교만하게 만든다. 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약점을 통해서 사단은 공격한다. 사단의 끈질김은 말씀 사용해도 계속 돌아온다. 사단은 우리로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라도 합리화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사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시험을 이기는 말씀을 간직하라. 3) 주님은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이기셨다. 예수님은 말씀에 헌신하라 하신다. 사단을 이기는 모든 것은 우리의 헌신에 달려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안다. 하지만 말씀에 헌신되지 않았다. 어떻게 말씀에 헌신되나? 마음에 새긴 말씀이 있어야 한다. 묵상된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 인용하여서 승리하신 것 아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함으로 자신이 무엇에 헌신되었음을 알게 하신다. 예수님은 말씀 순종에 헌신되셨다.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고 죽어도 순종한다! 생명걸고 순종한다! 십자가도 진다! 우리의 실패는 피흘리기까지 순종하려 하지 않기에 진다. 잘못된 습관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나의 헌신의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끊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죄를 움켜쥐고 있으니 넘어진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유혹과 죄를 이기게 한다.

예수님은 세가지 시험을 받으신다. 예수님의 광야의 시험은 예수 안에서 우리도 시험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걷고,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하여, 주님께 헌신함으로 시험을 이기자!

 
8/8/2010              삼위일체 하나님                  마태복음 3:16-17

기독교 진리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게 한다. 왜 삼위일체를 믿는가?

첫째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성경이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는데 삼위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성자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음성으로 예수님을 높여주신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이는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1)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요6:27, 벧전1:2, 엡4:6).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갖고 돌아보시는 아버지이시다. 2)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하신다 (요1:1, 요20:28, 히1:8).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경배할 때에 그 고백과 경배를 그대로 받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히1:8은 아들을 말하면서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이다 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셨다. 3) 성경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하신다 (행5:3-4, 고전3:16). 성령을 속인 것이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성령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성령, 성부, 성령이 하시는 일과 삼위의 속성이 모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일을 어떻게 설명하나? 1) 아들과 성령님이 하나님의 속성 가지심을 증거한다 (요6:69, 엡4:30).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시다. 2)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신다 (요1:3, 창1:2).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라 부른다. 그런데 그 창조에 예수님도, 성령님도 역시 동참하셨다. 예수님도 창조자이시다. 3) 아들과 성령님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 처럼 예배를 받으신다 (빌2:10, 고전3:16). 4) 성경은 아들과 성령님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증거한다 (빌2:6).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이시다. 또한 세례를 줄 때에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주님께서 명하셨다. 이는 삼위의 하시는 사역과 속성이 하나님의 속성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삼위의 독특하고 구별되심을 믿는 것이다.
1) 먼저 삼위는 독특하시고 구별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 (요3:16, 요5:32, 갈4:4). 2)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으로 부터 구별되신다 (요14:26, 요15:26).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을 보내신다. 3) 성령은 인격이시고 다른 위 Person 이시다 (요16:13-14, 행15:28, 눅12:12).인격이시기 때문에 교제할 수 있다. 사귐이 있다. 성령님은 능력이나,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시다. 그분 이라고 불러야 한다. 삼위의 각 위는 구별된 기능을 가지신다. 하지만 그의 성품이나 속성은 구별되지 않으신다 (essence). 세례 줄 때에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마28:19-20). 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름은 이름들이(복수) 아닌 이름 (단수)이다. 삼위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한가? 1) 삼위일체 하나님은 늘 함께 일하신다. 창조도 삼위 하나님의 역사고, 구원도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모든 일들을 함께 하신다. 2) 하지만 하시는 기능이나 역활은 다르다.  하나님 아버지 성부는 고안하신다 기획하신다 (the Originator). 아들 예수님은 그 계획과 뜻을 성취하신다 (the Agent).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또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성령님은 주관하시고 운행하신다 (the Administrator). 3) 삼위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신다. 4)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장해 주신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 나타나는 때가 언제인가? 1) 천지 창조 때에 삼위의 역사로 창조하시고, 또한 2) 예수님의 세례받고 공생애 시작하실 때와, 3)승천 전의 마지막 명령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 세우실 때, 그리고 4) 새하늘과 새땅을 여는 천국이 시작될 때에 계시되신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보장이다. 넘치는 은혜가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책임지신다. 절대주권자이심을 증거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는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삼위 하나님을 믿으라! 삼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라!

 
8/1/2010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              마 3:13~17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 온 우주가 기다리던 순간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원자로 오셨다.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으로 나아오셨다. 죄없으신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 받으실 필요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요한의 세례는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찾아 오셨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 오신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수 없다고 사양한다. 자기의 세례는 예수님이 받으실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양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사양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세례를 주나? 예수님의 신들기도 감당 못하는데 감히 어떻게 세례를 베푸나? 세례요한이 도리어 주님의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례요한처럼 경건한 사람도 주님의 은혜가 더 갈망되었다. 주님이 주실 수 있는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알수 있다.  세례요한이 주님의 은혜를 갈망했다면 하물며 우리야 말할 것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를 찾아 오셔서 죄인의 자리에서 서신 그 예수님을 내가 필요로 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먼저 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겸손함을 나타내신다. 주님은 자신을 비우고 낮은자리에 오신다. 인간으로 나시고 심지어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대신 지신다.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가장 천한 자리에 임하신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다. 그래서 이제는 죄인이 받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다. 이것이 천국의 가치관이다. 2) 예수님의 세례는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취임식이다. 세례요한에게 오셔서 세례요한의 소개를 받으신다. 그리고 메시야로서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사적생활을 끝내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공적 생활에 충성하신다. 3) 예수님의 받으시는 세례로 모든 의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과 길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의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 순종하신다. 심지어는 십자가도 다 지신다.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고, 아버지의 소원이 내 소원이고, 아버지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된다. 아버지의 의를 이루는 것이 내 사명이 된다. 그리고 주님은 뒤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달려가신다. 세상은 권세와 능력을 추구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다. 하나님의 소원 따라가는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가?

셋째로, 예수님은 성령충만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시니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난다.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는 주님 앞에서 하늘이 열린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다. 삼위 하나님의 증거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장면인가?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시작한다. 이사야42장, 61장의 예언의 성취이다. 이제 예수님은 공생애를 성령에 이끌리시는 생활을 사신다 (4:1). 예수님은 성령충만하여 사역을 시작하신다. 출생도 성령으로, 사역의 시작도 성령으로, 사역의 마지막도 성령으로 하신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증거처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행2). 경건한 세례요한이 성령충만을 원했다면 하물며 나는 어떠한가? 예수님도 성령충만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면 하물며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자. 하늘문이 열리기를 사모하자. 주님이 열어주셨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자.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


 
7/25/2010            회개의 상급          (마 3:1-12)

회개는 구원 다음가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죄를 지어서 회개하는 데 무슨 상급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회개할 때마다 놀라운 은총을 주신다.

첫째로 회개의 상급으로 유쾌하게 되는 은총을 주신다 (행3:19).
유쾌하게 되는 날은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회들을 말한다. 그렇다 회개하면 죄에서 해방이 된다. 영적인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고, 신선함과 감격이 넘친다. 회개란 무엇인가? 인생의 방향이 180도 바뀌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고 죄를 향하여 살던 인생이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가는 방향전환이다. 죄 지은 것을 애통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버리는 생활이다. 회개는 두가지 면이 있다. (1) 단번의 회개이다.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온다.  (2) 지속적인 죄용서 받음이 죄를 자복, 고백함을 통해서 온다. 회개함으로 온몸을 씻은 사람은 손발을 씻기만 하면 된다.
회개의 근거는 예수의 피가 죄를 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 즉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회개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버림을 가장 기뻐하신다 (행17:30). 이제는 어디서나 누구든지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명하신다.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가? 1) 세례요한의 첫번째 메시지 가 회개이다 (마3:1-2). 2) 예수님의 첫번째 설교도 (마4:17), 3) 베드로의 첫번째 설교도 (행2:38, 3:19) 회개이다. 4) 바울의 설교도 회개가 주제이다 (행20:21). 바울의 간증도 자기 회개 간증이다. 5) 복음의 내용은 회개이다 (막1:14,15). 6) 교회의 첫번째 원리 도의 초보도 회개이다 (히 6:1). 회개없는 믿음은 없다. 회개없는 천국도 없다. 또한 회개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회개하면 유쾌함이 기쁨이 평강이 임한다. 인생이 숨이 막히나? 인생이 갑갑하고, 힘들고, 기쁨이 없는가? 회개함이 해결이다. 회개함으로 유쾌함의 감격을 누리기를 축복한다.

둘째로 회개의 상급으로 회복함을 주신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부르셨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회복의 사역이다 (눅1:17).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회개이었다. 회개는 회복의 열쇠이다. 회복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회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에는 전제가 따른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인이고, 상했고, 깨어졌고, 망가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른다. 라오디게야 성도들 처럼 착각 속에서 산다. 회개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회개의 사전적인 의미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의 회개는 원래보다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 원래보다 더 좋게 회복시켜 주신다. 회개는 우리의 상함에서 치유받게 한다.회개는 절망에서 소망을 준다. 회개는 죄에서 이기게 한다. 욥은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그랬더니 갑절의 축복이 온다 (욥42:10; 12). 인생들은 죄로 인해서 또한 죄의 결과로 잃어 버린 것 너무 많다. 죄로 상하고, 죄로 기능장애 dysfunctional가 되었다. 결함이 생겼다. 회개하면 치유가 시작된다. 원래보다 더 좋게 회복시켜 주신다. 회개함으로 회복되자!

셋째로, 회개의 상급으로 부흥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부흥을 주신다 (고후 7:8-11). 회개하는 마음은 주님을 위한 열심을 불러 일으키신다. 우리는 너무 눈이 멀어서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하는 마음이 없어서 회개가 어렵게 느껴진다. 회개하는 것은 크신 은혜이다.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회개하면 하나님은 부흥을 주신다. 부흥의 증거는 1)내가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예배가 찬양이 기도가 말씀이 좋아진다. 감격이 된다. 또한 부흥은 2) 열정을 회복시켜 주신다. 부흥의 결과는 사랑이다. 먼저 (1) 하나님 사랑하게  (2)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진다. 회개는 전염성이 있다. 회개한 베드로, 회개한 제자들이, 회개한 예루살렘 거민을 낳고, 회개한 이들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이들이 세계로 나가는 폭팔력으로 쓰신다.

사실 회개의 상급이란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매우 크시다. 최고의 은총 회개의 상급을 누리자. 주여! 부흥을 주소서!

 
6/18/201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요한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했다.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회개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메시야 오시기 이전에 보내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엘리야이다. 천국을 준비케 하는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라고 외쳤다. 메시야를 준비하는 첫번째는 회개함이다. 광야에서 증거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나왔다. 놀랍게도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다. 회개하라 라는 말은 생각을 바꾼다는 말이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죄를 향하던 것이 주님을 향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천국에 들어간다 생각했다 (눅3:7-8). 하지만 세례요한은 증거한다. 천국에 갈 자격은 마음과 뜻의 변화해야 한다 즉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다. 요한의 세례는 우리가 받는 세례와 다르다. 그것은 약속을 바라보는 세례이다. 하지만 그가 증거하는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죄용서를 주신다. 가장 복된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깨닫는 사람들이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에도 죄인인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회개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즐겨 받으신다. 다윗도, 베드로도 회개한 사람들이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음이 부끄러운 것이다. 마음을 바꾸라. 회개는 하나님을 의지함을 나타낸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회개함으로 주의 길 예비하자.

둘째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친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왔다. 이들은 종교적 리더들이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증거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세례 받으러 나감에 화가 났다.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례요한의 책망은 강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불렀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천국가는 백성이 아니라 뱀의 후손 (창3:14)이라 했다. 이것은 선지자적 선언 (사14:29; 30:6)이기도 하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장차 임할 진노를 받게 된다.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책망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인가? 세례요한은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의 생활은 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라! 외친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은 마음이 변화되지 않았다. 이 말은 열매가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구원받은 열매 보인다는 말씀이다. 생각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마음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  생활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는 고발이다. 그들은 율법을 신뢰하고 믿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킨다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아니다. 사실 율법을 어기는 자이고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주님의 책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율법은 지킨다 하나 율법의 정신과 본질과 실상을 부인한다고 지적하셨다. 이미 심판이 왔다 (10절).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이다. 알곡은 곡간에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지옥에 간다. 알곡이 무엇인가? 선한 행위로 알곡이 되는가? 아니다. 알곡은 생명이 있다. 쭉정이는 생명이 없다. 알곡은 생명이 있기에 열매를 맺는다. 쭉정이는 생명이 없기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었다. 마음의 변화가 없고, 생활의 변화 없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회개의 결과로 내면의 변화로 얻은 열매이다. 예수님은 열매에 대한 많은 말씀을 하셨다.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비결은 간단하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된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 많이 맺는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다. 열매는 붙어 있는 자에게 자연적으로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나? 회개로 예비하자.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예비하자. 주님 오심이 심히 가깝다.

 
7/11/2010            하나님의 보호하심             (마 2:13-23)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목자가 되신다. 주님을 따르면 무슨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지시해 주심으로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 가장 안전하다. 요셉은 꿈으로 지시하심을 받는다. 지시하심대로 행하니 헤롯대왕의 위협에서, 아켈라오의 위협에서 피하게 된다. 그렇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뜻의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에서 어디로 인도하실지 아신다. 나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축복이다. 성도들이라고 어려움 당하는 것 제외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고통을 피해가지 않으셨다. 사단이 공격을 한다. 두살미만의 아이들을 죽임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사단은 오늘도 교회 핍박하고 성도를 핍박한다. 교회 말살정책, 성도 말살 정책을 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반드시 승리케 하신다. 하나님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전쟁에서 이길 힘을 주신다. 핍박속의 은혜를 주신다. 성도들을 강하게 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지시하심을 받는가? 요셉은 꿈으로, 동방박사에게는 별과 꿈으로 지시하셨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 말씀 속에서 길이 있다. 말씀 속에서 앞길을 제시하신다. 나는 말씀을 잘 듣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다. 잘 들어야 한다. 많이 들어야 한다. 골리앗의 세상에서 다윗 처럼 사는 방법은 잘 들음으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자!

둘째로 하나님은 공급하심으로 보호하신다.
하나님을 공급하심을 잘 보라. 말씀을 믿으면 공급하심이 보인다 . 요셉에게 명령이 갑자기 내린다. 헤롯의 핍박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라 하신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반드시 공급하심이 있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무엇인가? 1)하나님은 경제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린다. 영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또한 애굽의 생활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2)하나님은 갈곳을 준비해 주셨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이미 헤롯의 피해 나온 유대인들의 사회가 있었다. 3)하나님은 갈릴리의 경험을 통해서 준비시키셨다. 요셉은 나사렛 출신이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많다. 로마의 행정부 가이사라가 있고 교역의 중심인 가버나움이 있다. 이들은 이방의 문명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헬라말 알면 다 통하는 시대이다. 모든 부르심과 명령을 받을 때에 믿어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할 만하니까 시키신다. 잘 보라! 공급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다. 두려워 말라. 목자이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보장하신 약속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도하심으로 보호하신다.
잘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도하신다.  1)때를 제시해 주심으로 인도하신다 (v19). 헤롯이 죽는다. 극한 고통 중에서 질병으로 죽는다. 그의 악한 행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2)방향제시로 인도해 주신다 (v20).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구체적 인도와 방향을 제시하신다. 3) 자세히 인도하신다 (v22). 악한 헤롯 아켈라오가 지배하는 유대가 아닌 갈릴리로 가게 하신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 불리우신다.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찮은 것도 쓰실수 있다. 요셉도 무명의 사람이고, 나사렛도 무명의 도시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 고귀한 이름들이 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누렸던 요셉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순종이다.   요셉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애굽으로 다시 유대로, 유대에서 갈릴리로 순종한다. 그의 순종은 말없는 순종이다. 행동하는 일어나는 순종이다. 또한 즉시로 순종한다. 요셉의 생을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요셉의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된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에 다가오는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우리는 힘들지만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충만하게 누리자.

 

7/4/2010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마 2:1-12)



인생의 최대의 질문이고 똑 대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

그렇다면 첫째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에서도 또한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도 반복되는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이다.  1)예수님은 왕이시다 (2절). 본문에도 계속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심이 강조된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신 왕이심을 증거한다. 본문의 동방박사들의 첫 질문도 유대인의 왕이 어디계시뇨 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증거하신다 (27:11). 군병들의 희롱 (27:29), 예수님의 죄패 (27:37),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조롱도(27:42) 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신다 증거한다. 2)또한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시다 (4절). 동방박사들의 질문을 헤롯은 그리스도이시라고 해석한다. 대제사장과 세기관들도 메시아 라고 (믹5:2) 해석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질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 라고 확인해 주신다 (26:63).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심판자 이심을 선언하신다. 3)예수님은 바로 그 한 다스리는 자 (미5:2, 마2:6)이시다. 우리 주님은 다스리는 자이시다. 왕이시다. 철장 권세를 가지신 심판주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재자이시다. 현대인은 왕, 다스리는 자 자체를 싫어한다. 현대인들은 제멋대로 자기 소견에 좋을 때로 행한다. 왕을 모심이 체질에 맞지 않다. 본문은 두명의 왕을 말한다. 헤롯 과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모시고 산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다스리심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통치 방법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목자이시다. 목자는 돌본다, 보호한다, 먹이신다, 물을 제공하신다, 동행해 주신다. 목자가 함께 계시면 양이 염려할 것이 없다. 양은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의 최고로 좋은 존재가 목자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시다. 목자는 사랑으로 다스리신다. 주님의 인도하심 받자.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자.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누리는 것들 무엇인가?
1) 동방박사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2절). 이것은 최고의 인생의 목적이다. 바른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박사들은 별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별의 주인을 찾는 것이다. 성경에 별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데 별의 상징 가운데서 가장 궁극적인 것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광명한 새벽별이시다 (계22:16; 2:28). 발람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이시다 (민24:17,19). 2)예수님을 찾으면,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 목자를 모신 양은 망하지 않는다. 인도하심을 받는다.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찾아야 할 분이시다. 3)예수님은 목자로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동방박사들의 믿음이 귀하다. 그들은 별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 별이 보여주는 예수님께 경배한다. 별을 추구하지 않고, 별이 보여주는 그분을 추구한다. 별의 주인에게 경배한다. 가장 귀한 믿음의 모습이다. 우리의 인생의 별은 무엇인가? 돈인가, 행복인가, 건강인가, 성공인가? 아니다. 우리의 별을 숭배해서는 안된다. 인생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4)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인의 여정을 보여 준다. 이들의 기대 헛되지 않는다. 아름답게 성취된다. 이들의 여정은 성경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는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의 의도가 무엇인가? 성령님은 우리가 바로 바로 동방박사들과 같다고 하신다. 우리는 동방박사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땅을 쳐다보고 사는 삶 보다 별을 보는 인생은 더 낳다. 하지만 그 이상의 생이 있다. 그것은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별의 주인이 되시고 창조자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고 사는 생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인생의 복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진정한 보화를 가진 사람이고 또한 진정한 행복한 자들이다.


     
6/27/2010            동정녀탄생                                          마 1:18-25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계속 공격 당하는 교리이고 앞으로도 계속을 공격 당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다.
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예언되어 있다. 원시복음이라고 불리우는 창3:15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를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한다. 이사야 7:14에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여기서 처녀라는 단어의 해석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용법과 문맥에서 나타난 의미는 분명하다. 본문의 마태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서 예수님이 여자에게서 나셨다 하셨다. 이것은 모두 동정녀 탄생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인 사실로 이해할 수 없다. 초자연적이 사건이지만 역사적인 사건이다. 어떻게 동정녀 탄생이 가능한가?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임하여 가능하다. 아담의 혈통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으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라야 구원자의 자격이 있다.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생명을 주시는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역사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많은 공격을 받아왔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 신앙은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님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다 (요6:42). 하지만 예수님은 요셉의 가문에서 오셨지만 요셉의 아들이 아닌 진실로 하늘로 내려오신 분이시다. 8세기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사생아라고 했다. 몰몬교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로마캐톨릭은 동정녀 탄생을 믿지만 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혼자 살다가 승천했다고  한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다. 20세기 초의 자유주의는 동정녀 탄생과 다른 중요한 교리들을 부인했다. 교회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가)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 (마1:20, 눅1:34-35).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동정녀 탄생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동정녀 탄생은 1) 예수님께서 죄없으심의 근거가 된다. 예수님은 아담의 죄의 혈통이 아닌 여자의  몸에서 태어 나셨다 (롬5:12).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시고 자범죄도 없으시다.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다. 2) 예수님의 신성의 근거가 된다. 3)성경의 무오와 권위를 믿게 된다. 4)다른 모든 중요한 교리들의 근거가 된다. 동정녀 탄생 부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 부인하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즉 성육신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도 부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을 잃게 된다. 동정녀 탄생은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 하나님을 믿으면 동정녀 탄생은 자연히 믿게 된다. 하나님을 창조주, 전능자, 능력자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못하실 것 없음을 또한 믿는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보게 된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에게 풍성한 삶을 주신다. 그리고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구원자 이심을 증거한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 신앙은 든든한 반석신앙의 기초가 된다.

 
6/20/2010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버지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를 아버지없는 사회라고 규정짓는다. 아버지의 귀중성은 성경이 거듭거듭 강조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버지상으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첫째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버지이시다. 요셉은 사랑의 아버지이었다. 1)그는 자기 아내 마리아를 사랑했다 (19절). 그는 약혼자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젊고 아름다운 소녀와 결혼하려는 꿈이 깨어졌다. 사랑하는 아내될 사람이 임신을 했다. 혼돈과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관습은 부정한 아내나 정혼자를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아를 생각하고 마리아가 공개적인 부끄러움과 창피를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이다. 좋은 아버지는 아내를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주님의 기준으로 아내 사랑하기를 힘쓰자 (엡5:25) 2)요셉은 아들 예수님을 사랑했다. 물론 아기 자기의 피는 아니지만 자기에게 맡기신 아기 예수님을 사랑한다. 아버지로서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돌본다. 이민도 서슴치 않는다. 좋은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한다. 3) 요셉은 하나님 사랑하는 아버지이었다. 이사랑의 힘은 하나님 사랑에서 온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보니 바로 아내사랑, 자녀사랑을 이루게 되었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버지는 경건한 아버지이다.
요셉은 생활 속에서 경건함이 나타났다. 1)요셉의 경건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타났다. 요셉은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한다 (24절). 그의 생활은 분부대로 행하여 라는 말 속에 나타난다. 요셉은 자신의 계획 실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자기계획을 바꾼다. (1)아내 마리아를 끊고자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결혼한다. (2)아내를 데리고 온다. (3)아내를 보호해 준다. (4)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짓는다. (5)아들을 보호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비결은 분부대로 행하는 생활이다. 나는 분부대로 행하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행하는 아버지인가? 아버지로 하나님께 순종함을 보이는 것이 최고의 영향력이 된다. 2) 요셉의 경건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난다. 요셉의 순종은 믿음이 필요한 결단이다. 요셉은 순종함으로 믿음을 보인다. 갑자기 하신 명령에 순종한다. 아무런 계획없이도 순종한다. 핑계없이 순종한다. 어떻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여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환경에서 양육하자. 3) 요셉은 경건한 직무에 신실했다. 가정에 모범을 보였다. 자녀들과 함께 성전에 가고, 절기에 참여하고 (눅2:41), 하나님의 집에 주기적으로 간다. 이런 경건의 모범이 미치는 영향이 필요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신실함을 보고 있다. 아버지로서 영적인 직무에 신실한 모범을 보이자.

셋째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버지는 지혜로운 아버지이다.
여기서 지헤로움은 세월을 아끼는 태도이다. 즉 시간을 사는 태도이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짧은 생애를 산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후에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요셉이 일찍 죽은 것 같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에게 주신 시간을 잘 사용했다. 자기 가족을 돌보고, 자신을 다른 식구들이 본받을 수 있는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자녀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양육한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온다 (마13:55). 그중에 둘은 주님에 의해서 기쁘게 쓰임받는다. 야고보와 유다는 성경의 저자가 되고 예루살렘과 초대교회의 지도자들로 사용받는다. 요셉의 자녀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애 이후에 믿음의 영웅들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 선택하신 것 처럼 하나님이 우리도 아버지로 선택하셨다. 또한 자녀의 실패가 아버지로서의 실패가 아니다. 우리는 어린 아버지이었던 요셉을 통해서 아버지들에게 교훈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 요셉의 순종은 자기의 인생을 바꿀 뿐 아니라 세계를 바꾸었다. 그렇다, 나의 순종은 수천 수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본다. 좋은 아버지/부모가 되기를 축복한다.

 
6/13/2010            임마누엘 예수

인류의 최대의 사건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임마누엘 예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임마누엘 예수는 성경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예언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이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이시다. 바로 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증거는 예수님의 족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언약의 성취로 오신 분이다. 이들을 공격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었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의 실패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구속의 역사는 가뭄 속에서도 마르지 않고 흐르는 지하수와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성경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사역과 직분의 이름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1)왕이고, 2)선지자이고, 3)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사역들을 말한다. 성경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열린다. 성경을 보면 과거가 열리고, 현재의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있고, 미래가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성취된다. 그러므로 말씀은 믿을 수 있다. 주님,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을 이루소서!

둘째로, 임마누엘 예수는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다.
예수라는 말의 뜻은 구원자이다 (21절). 예수는 예수님의 육신의 이름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실 일들을 보여주시는 이름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며 사명이다.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가 두사람이 나온다. 1)가나안 땅을 정복한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다 (신34:9). 또한 2)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다 (학1:1,12,14; 슥6:11-13).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원하신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해 주실 일이 많은데 예수의 하신 일은 바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렇다 인간 최대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이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죄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이 바로 창세기에 나온다. 아담과 이브는 범죄하자 무화과 옷을 입는다. 행위종교이다. 행함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덮으려 한다. 주님의 해결은 가죽옷이다. 피를 흘림으로 죄용서를 받는 사죄의 종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마26:28, 벧전2:24). 죄용서 받는 체험이 신앙생활의 원동력이다. 죄용서에서 감격과 감사과 은혜생활의 시작이다. 예수를 믿는 바로 그 사람은 이와 같은 행복을 경험한 사람이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즉 불가능한 문제 해결해 주신다.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

셋째로, 임마누엘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제일 감격 중에 감격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구약의 임마누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사7:14). 임마누엘은 그리스도의 상징적이고 예언적 칭호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잉태 즉 성령에 의한 수태의 결과를 선언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말한다. 임마누엘이란 말씀 속에서 1)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2)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한다. 어떤 우리인가? 문둥병에 걸린 인생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 가운데 나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냥 사람을 보내서 구원하심이 아니다. 오셔서 함께 거하신다. 구원하신다. 그리고 감격스럽게도 우리와 함께 사시는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엑 평화와 기쁨을 주시고,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임마누엘은 최고의 축복이다. 예수는 최고의 선물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관계하시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이신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하지 않으심을 보이신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롬8:31).

내 평생에 함께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리고 모든 장애를 뛰어넘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6/6/2010           예수님은 왕이시다    (마태복음 1:1-17)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신약을 시작하는 성경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이며 구원자이신 왕이시다 라고 선언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이었던 마태에 의하여 주후 58~68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마태복음은 첫 번째의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을 통해 영향을 받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데 복음서 전체는 왕되신 예수님에 대한 주제가 반복된다. 마태복음의 첫머리에 족보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요 다윗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이시다 (1절).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은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이다. 족보고 14대로 3개로 나누어진 것도 다윗의 음가이다. 왕가에는 분명한 족보가 있다. 그 족보는 다윗왕가의 족보이다. 동방박사도 유대인의 왕을 찾았다. 예수님의 비유속에서 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왕으로서 입성이다. 빌라도의 심문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가? 이었다. 예수님의 죄명도 유대인의 왕이었다. 군병들의 희롱과 조롱도 유대인의 왕에 대한 것이었다. 진정 그는 구약에 예언하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유대인의 왕이시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왕이시다.
1) 먼저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한 왕이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족복에tj도 비록 의로운 사람들이 있지만 죄인들이 더 많다. 예수님이 다윗의  가족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이시다. 예수님의 가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죄인들의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들이 들어간 것도 희귀한 일이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방인들이고, 죄인들이고, 신분의 문제가 있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오심을 증거한다. 2)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왕이시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가 있다.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 아니다. 억지로 등을 밀어서 들어온 이방인들이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왕이 되심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성경의 주요한 예언 중에 하나는 메시야를 통해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고, 죄인들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왕이실 뿐 아니라 3) 무가치 한 자들의 왕이시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아무것도 아닌 nobodies 리스트이다. 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쓰는 사람들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사회적 지위, 능력, 힘 이런 것들이 아니다. 도리어 미천한 자들 쓰신다. 놀라운 성경적인 원리이다. 무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가문을 준비케 하신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셋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다.
예수님은 영원한 통치자이시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묘사한다. 마태   28:18-20은 예수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증거한다. 영원하시다. 주권이 예수님에게 있다. 영원하신 왕이시고, 왕이시게 모든 주권이 그에게 있다. 그래서 영광과 존귀과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있다. 이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제는 왕권을 가지고 영원토록 왕노릇하신다 (마28:20). 성도들은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왕노릇한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이사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자들에는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큰 문제이다, 왕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이다. 사단의 죄도, 아담의 죄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함이었다. 또한 예수님을 왕으로 믿으면 나는 왕노릇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자. 이땅에서도 그의 왕국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자. 그리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자.


 
5/30/2010            이 타 주 의                                               빌립보서 2:3-4

이타주의는 생소한 말이다. 이기주의의 세상에서 너무 젖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가장 복된 생활의 모습으로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타주의의 회복을 원하신다.
이타주의는 우리의 것이었는데 우리가 잃어 버린 축복이다. 에덴동산에서는 이기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창조하셨다. 그들은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다 (창2:25). 벌거벗었다 라는 말은 터놓는다 는 뜻이다. 상호의 관계가 완전히 투명했다. 서로 방어적이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뜻은 서로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즉 감추어진 영역이 없고 저항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열중했다. 자기를 보지않고 상대만을 위하는 생활을 했다. 에덴은 이타주의의 세계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그들은 자아에 몰두하게 되었다 (창3장). 자기의 벗은 것을 깨닫고 가리웠다. 다른 사람 중심의 관심이 자기 중심으로 바꿔어졌다. 그리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려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마지막은 하나님에게서 숨으려 했다(창3:8). 죄는 인간을 이기주의 세계로 몰아 넣었다. 즐거움을 위해 만드신 동산을 죄인의 도피장소로 바뀌었다. 자기 중심이 되니까,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렇다 죄의 패턴은 이기주의의 패턴이다. 인간의 역사들 통해서 지금까지 재현된다. 1) 자신에게 몰두케 하고,  2) 다른 사람을 위한 관심을 떠나게 하고,  3)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다. 하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변화의 길이 있다. 하나님은 이기주의 세계에서 이타주의로 회복을 원하신다.

둘째로, 이타주의의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본문 빌2:3-4에 보면 이타주의 의 세계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천국의 이타주의에서 이기주의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주님은 전혀 죄가 없으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완전한 이타주의로 사셨다. 제자들은 이기주의의 세계속에서 산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기주의 생활이었다. 막10장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겠다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면서 모두 분히 여긴다. 다 이기주의에 빠졌다. 예수님께서는 그 해결로 자신의 모습을 제시하셨다 (막10:42-45). 예수님이 오심은 섬김이고, 대신 죽기 위함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시는 이타주의의 실천이셨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심도, 성육신하심도, 가난과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경험도, 십자가를 지심도, 죽으심도 다 우리를 위하신 삶이시다. 완벽하게 이타주의로 사셨다. 세상의 전략은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와 자기 중심의 세계를 이기는 하나님의 전략은 이타주의이다. 이타주의 실천은 이기주의 질병 치유하는 비결이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치료받기 시작한다. 오늘도 사람들은 두가지 방어자세를 가지고 있다. 1) 숨는 일과 2)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로부터 온다.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충만케 함으로, 복음을 따름으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회복은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다.

셋째로, 이타주의의 실천은 종의 생활을 살아감으로 성취된다.

어떻게 종의 생활을 사는가? 주님을 본받은 생활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v5).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겸손이다 (v3). 겸손은 당시 사람에게는 미덕이 아니다. 노예근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꾸셨다.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다. 예수님의 마음이다. 어떻게 실천할까? 율법으로 하면 실패한다. 복음으로 하면 가능하다. 이기주의 모습은 나만을 위하는 생활이다. 이타주의 모습은 예수님이고 복음이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사신다고 하셨다. 어떻게 사는 것인가? 1)주는 일 이다. 2) 용서하는 생활이다. 3) 잊어버리는 생활이다.

이타주의 생활의 열쇠는 1)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이타주의 실천 가능하다. 2) 또한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종의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가? 감사하자. 부족한 부분들이 많은가? 성령님께서 이 부분에서 도와주시기를 구하자.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변화는 인생의 최고의 은총들을 누리는 비결이다.

 
5/23/2010              여호와를 위하라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들어서 비범한 일을 행하시는 전문가이시다. 기드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 가장 복되고 강력한 삶은 여호와를 위하는 생활이다.

첫째로,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은 약함에서 강하여지는 은총을 받는다.
여호와를 위하면 능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면을 보신다 (삿6:13-16).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이다. 1)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용사라 부르신다 (6:12).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사실 이것은 기드온의 현재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들어주실 그 마지막 모습으로 불러주신다. 2)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구원하라. 힘을 주신다. 3)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 또한 4)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 치듯하리라 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 은총들은 여호와를 위하는 자들이 받는 은총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신다. 그리고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보신다. 아니 이 잠재력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일어나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한자를 강하게 만드신다. 이 음성을 듣자.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

둘째로,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질문들은 받아드려주신다.
여호와를 떠난 생활의 특징은 상한 마음이다. 실패이고 자포자기 이다. 어려움으로 인한 의심으로 가득한다. 기드온도 역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건강한 자아상의 부재이다 (6:13,15).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한다.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들은 연약함은 극복하게 하신다. 하지만 성도들의 의심과 질문은 하나님을 힘들게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정직한 질문을 기뻐하신다. 의심을 위한 의심아닌 진정한 마음의 토로를 받으신다. 주님은 생각하는 믿음을 장려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없이 결정하기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주님을 어두움 속에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고 빛 가운데 따르라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기 전에 댓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눅14:25-34). 생각하는 믿음은 우리를 든든하고 강하게 만든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정직한 질문을 환영하신다. 내가 맡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따를 때에 내가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다.

셋째로,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행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위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보이시고, 그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위하는 우리를 책임지신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가정과, 모든 경영에 인도하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신다. 증거를 보이시면서 모든 종류의 확신을 갖게 하신다. 반석에서 불을 내어서 제물을 받고, 양털을 젖게하는 이상한 요구도 들어주신다. 인도하심을 따르려면 1) 가정을 바로 세워야한다. 기드온은 자신이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는다. 그 제단의 제물은 바로 자기 집에 있던 아세라 목상을 찍어난 화목이었다. 그는 밤중에 10명의 종과 함께 아세라 목장을 찍어서 화목으로 불태워 버렸다. 오늘 나의 삶에서, 가정에서 버려야 할 나의 아세라 목상은 있지 않는가? 찍어 버려야 할 우상은 무엇인가? 2) 또한 우리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음을 믿고 담대해야한다. 기드온은 인도하심 속에서 점점 강해진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300명으로 미디안의 13만5천과 싸우는 믿음을 보인다.

여호와를 위하는 사람들은 약함 중에서도 강함을 누린다. 여호와를 위할 때에 나의 힘이 아닌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위하는 생활을 하자 가장 강력한 승리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비결이다.

 

05/16/2010             가족을 축복하라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을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략은 가정을 복주시는 것이다 (창1:28-31). 에덴에서의 사단의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첫째로, 가족을 축복하는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다. 함께 하심이다.
동양인들은 5복을 말한다. 이 땅에서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8복을 말씀하셨다. 성경의 복은 무엇인가? 오벳에돔의 복이다. 이 땅에서의 복 뿐만 아니라 영적인 복이다. 이 세상의 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이다. 무엇을 추구하나? 1) 땅의 복 추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상숭배로 전락한다.  2) 영적 복을 추구하면 하늘의 복도 누리고 땅의 복도 누리게 하신다. 3)하나님이 땅의 복 주지 않으실 때에도 영적인 복 추구해야한다. 진정한 복은 무엇인가? 모든 복의 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오벳에돔은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법궤를 모심으로 받은 복이다. 법궤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잃었다. 하나님의 능력 없는 증거는 승리가 없다. 삶의 승리가 없다. 죄와의 싸움 진다. 평안이 없고, 회개가 없으며, 감격이 없다. 법궤를 잃어 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없다. 복의 근원이 아니다.

둘째로, 가족을 축복하는 길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함이다.
임재하시면 복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있는가?  1) 죄인들은 주님의 임재 감당 못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불레셋에게 저주이다. 재앙이었다. 두려움이었다. 2) 주님의 임재를 무시하던 웃사는 죽임을 당한다.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두려운 죄인가 알게하신다. 3) 복된 사람들은 주님의 임재를 사모한다. 오벳에돔은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복을 받는다. 소문난 복이다. 하나님의 궤는 불레셋 사람들이나 웃사에게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이나 백성들을 향하신 뜻이 아니다. 오벳에돔은 주님의 임재를 통해서 은총을 누린다. 법궤를 모시는 3개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 1)오벳에돔이 복음 받고, 2) 온 집이 복을 받고, 3) 복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게하고, 4) 다른사람에게 법궤를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시킨다. 가정을 축복하기 원하는가? 하나님을 모시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예수님을 모시면 은총이 임한다. 잃어버린 법궤를 회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충만하게 누려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한다. 법궤의 의미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래서 법궤를 다시 모시고자 한다. 이번에는 제대로한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다. 그의 태도가 즉시로 변한다. 계획도 변한다. 방법도 성경데로 변한다. 메는 방법을 제대로 어깨에 맨다. 매는 태도가 기쁨으로 맨다 (12절). 매는 사람을 제대로 레위인들로 하게 한다 (13절). 여섯 걸음마다 제사드린다. 예배없이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다. 성령충만한다. 오벳에돔의 복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두려워 안한다. 자신도 두려워 할 필요 없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복이 오벳에돔과 온 집에 임함 본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에 나도 저런 복을 원한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다. 최고의 찬양을 드린다 (14절). 그것도 부족해서 춤을 춘다. 그의 옷이 바뀐다 옷이 바뀐다. 베 에봇을 입는다. 하나님 안에 푹 빠진다. 자신을 버린 예배이다. 하나님께 집중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그것은 축제로 바뀐다 (15절). 다윗 은 자신을 잊은 예배한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다. 성령으로 충만한다. 그렇다. 가정을 축복하려면 나를 잊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다윗의 변화는 다른 사람을 축복한다. 1)자신이 복을 받음을 깨닫는다. 오벳에돔의 복 믿는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법궤가 넘쳐 흐름을 체험한다. 그래서 나누어 주고 싶다. 2)백성들을 축복한다 (18절). 3)자기 가족을 축복한다 (20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실천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받기를 거절하라. 가족을 축복하는 길이다! 복을 받는 것은 복을 주고자 받는 것이다. 복의 사람이 되자. 복을 나누어주자


 
05/0/2010              어머니의 사랑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어머니의 사랑은 감동적이다. 성경에 좋은 성경의 어머니들도 많지만 본문은 보범이 되지 못하는 창기 어머니를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첫째로, 어머니의 사랑은 넘치는 사랑이다.
본문의 어머니는 창기이었다. 그는 완전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완전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질타한다. 어머님를 심하게 대한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어머니 탓을 한다. 본문의 두 어머니들은 창기들이다. 이들은 실수로 아들을 죽이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곳 왕 앞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솔로몬의 지혜가 뛰어남을 보여주기 위한 예이다. 그런데  왜 솔로몬 같은 왕이 이들의 문제에 대하여 신경을 쓸 일이 있나? 물론 매우 어려운 케이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솔로몬이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님이 관심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어려움와 아픔에 관심가지신다. 창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잃어 버리지 않으려고 왕앞에 서기까지의 수많은 과정과 책망과 압력을 견디었다. 천대와 멸시와 비웃음 속에서 결국은 왕 앞에 섰다. 그 이유는 어머니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다. 넘치는 사랑이다. 창기 어머니는 하나님의 이상에 따라서 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 여인들을 사랑하신다. 우리의 어머니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하다. 자식인 우리가 완전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풍성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어머니이시다.

둘째로 어머니의 사랑은 불붇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신다. 어머니의 기도는 응답 효과 높은 기도이다. 하갈의 기도도 들으시고 요게벳의 기도도 들으신다.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왜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실까? 어머니의 기도는 가장 이타적인 기도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어머니 마음은 어떤가? 26절에 보니 불붙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불붙는 듯하다. 자녀가 아플 때에, 자녀가 어려울 때에, 자녀가 실망할 때, 자녀가 잘 될 때에 어머니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다.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마음이 불타는 듯한 기도는 진실한 기도이다. 마음이 불타는 듯한 전도는 상대의 마음 움직인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위해 마음이 불탔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솔로몬의 지혜를 과시하시기 위함인가? 물론 본문은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씀이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은 어머니들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낳은 아들을 사랑하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창기 어머니라도 창기의 아들이라도 사랑하신다. 나의 어머니도 사랑하시고, 나도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의 지혜 어떻게 누리는가? 불붙는 듯한 사랑을 소유할 때이다. 우리에게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는 필요하다. 어머니의 불붙는 듯한 사랑은 그것을 누리게 한다. 이 사랑을 하면서 살자.

셋째로,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어머니 사랑의 본질은 희생적 사랑이다. 자녀를 위하여서라면 자기를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녀와 남편과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재능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포기한다. 이 사랑은 귀족의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밑바닥에 살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살는 어머니에게도 있는 사랑이다. 어머니 사랑은 빈부귀천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창기 어머니의 최고의 관심은 아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싸워 왔다. 그런데 두 어머니가 서로 아기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솔로몬은 사랑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본질적인 것을 시험한다. 아기를 죽여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창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얻고자 왔는데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마음이 불붙는 듯하여 이 아기를 죽일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 결심한다.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아이를 잃어버리겠다. 살리기 위하여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포기하겠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겠다. 희생적인 사랑이다. 

성경에서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 불붙듯한 사랑,  희생적 사랑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니다. 어머니가 자녀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가깝게 보여주는 것이다 (호11:8).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신다. 십자가의 사랑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이다. 어머니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보이신다. 부모님 사랑해 드리자. 그리고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5/2/2010            생수가 넘치는 교회  (창 21:14-21)                                                             


세계적인 사막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막화 현상이다. 어떻게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서 생수가 넘치는 은총을 누릴까?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직면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불화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다.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을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어 줄 것을 말씀하시고 이스마엘을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 하신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는 것은 영적인 교훈이 있다. 인간의 수단이 하나님의 수간을 거스리며,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희롱하고, 율법이 복음을 핍박한다. 이것이 광야이다. 하갈은 죽어가는 이스마엘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떡과 물 한 가죽부대가 다 말랐다. 한계상황이 왔다. 나의 한계상황은 무엇인가? 나의 가정, 직장, 사업, 혹은 과거의 사건이 우리를 메마르게 한다. 문제의 해답은 오아시스이다. 생수가 터지면 산다. 광야생활은 방황이다. 그런데 나의 가죽부대의 물이 마를 때에 우리의 방황은 끝나게 된다. 하갈은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눕혀놓고 화살 하나 쏠 만큼 가서 자기 아들을 바라본다. 나는 한계생활을 직면할 수 있는가? 내가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한계상황의 인간을 찾으신다. 범죄한 아담을 찾고 (창3:9), 범죄한 가인을 찾으신다 (창4:9).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나의 상황을 직시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한 야곱은 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하갈은 아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방성대록한다. 마침내 방성대곡이 터진다. 안봐야 되겠다 하다가 마주 앉아 보고 방성대곡한다. 평생 한번도 울어 보지 못하는 자 있다.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의 사막을 지나고 있다. 사막화 보다 더 황폐한 것은 영적 사막화이다. 정말로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죽 부대의 물이 다했다. 하갈은 하나님 앞에서 방성대곡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신다. 하갈의 방성대곡도 들으신다. (17절, 2번). 1) 한계상황의 방성대곡은 하나님의 은총만 사모하는 것이다.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의지한다.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방성대곡할 수 있으면 산다. 베드로는 엄청난 범죄 후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까 회복해 주신다. 문제가 엄청나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방성대곡하지 못해서 망한다. 2) 하나님 앞에서 방성대곡 할 때에 나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로 바뀌어 주신다. 이스마엘은  하갈의 자식 이었다 (v15,16, v17) . 그런데 이제는 그 아이로 바뀐다 (v17,17, 18, 19,20). 하나님의 아이로 바뀐다. 그 시점이 하갈의 방성대곡이다. 방성대곡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이다. 두손을 드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때에 자유함이 온다. 십자가 밑에서 해방이 온다. 생수가 터진다!

셋째로, 우리가 한계상황을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 때에 생수가 터지는 은총을 누린다.
하갈이 한 일은 마주 대면하여 방성대곡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해 주신 일들은 너무도 많고 감격적이다. 1) 하나님이 기도 소리를 들으셨다 (17절)  2)일어나 가서 아이에게 네손으로 붙들라 (18절) . 함께하심을 확신시켜 주신다. 3) 이스마엘로 큰 민족이 됨을 약속해 주신다. 4)하갈의 눈을 밝히신다. 5)하갈이 샘물을 본다. 가죽부대는 마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샘물은 마르지않고 다함이 없는 은혜이다. 6)비었던 가죽부대에 생수를 채운다. 7)마침내 이스마엘이 마시게 된다. 생수가 메마른 광야에서 생수가 넘치는 은총을 누린다. 그렇다 목회자의 눈물은 교회를 살리는 사막의 생수가 되고, 어머니의 눈물은 아이를 살리는 생수를 가지고 온다.

사막화되는 이 세상에서 생수의 넘침 속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와 현실을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 때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긍휼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생수가 넘치는 교회, 가정되시기를 축복한다.

 
4/25/2010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만남이 시작됩니다.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많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남이 중요하지만 그 만남후에 서로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그 만남이 행복하고 좋은 만남이 되지만, 관계가 나쁘게 되며는 불행한 만남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행복한 만남은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이 정말 중요하지만 만남후에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며 살수도 있고, 힘든 삶을 살수 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좋은관계를 가지고 이 땅에서 지상 천국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였습니다. (29절)
본 절에서의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라하시는 말씀에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위를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 구원 주로 믿었기 때문에 담대히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로 발을 내 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발을 물위로 내딛을 수 있는 관계입니까?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을 굳건히 믿는 믿음으로 베드로와 같이 바다위를 다 걸으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는 즉시 부르짓는 관계였습니다.(30절)
본 절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빠져 갈때에 소리지르는 모습이었습니다.물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면서 소리지른 것이 아니라 빠져가는 순간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든 일이 시작될 때에 소리를 질러야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어려운 일이 생기기 시작할 때 바로 소리를 질러야합니다. 능히 우리를 어려움에서 구원하여 주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후에 다른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가장 먼저 소리 지르는 관계가 되어 모든 어려움를 예수님을 통하여 다 해결함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는 즉시 손을 내미시는 관계였습니다. (31절)
본 절에서는 예수님의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구원해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즉시 부르짖을 때에 즉시 구원하여 주시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친히 손을 내미셔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붙들어 주시는 사랑을 느낄수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신 예수님 자신의 몸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즉시 부르짖을 때에 즉시 손을 친히 내미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하시고 믿고 부르짖어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을 체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관계, 즉시 부르짖는 관계, 또 예수님께서 즉시 응답하시는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구원의 감격, 기도응답의 확신, 하루 하루가 예수님과 함께 지상 천국을 누리시고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11/2010             가운데 서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운데 서신다. 가운데 서시는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문들을 닫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 오셔서 서신다. 무엇을 주시나?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운데 서셔서 평안을 주신다 (19절, 21`절).
부활의 주님은 평안을 선포하신다. 평안은  성도의 삶의 열쇠이다. 위대한 생을 사는 열쇠이고, 교회의 교제의 열쇠이고, 복음증거의 열쇠이다.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의 가운데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의 중심에 계실 때에 우리는 승리를 누린다. 부활의 주님은 평안을 공급하신다 (사26:3, 롬5:1, 빌4:7). 심지어는 풀무불 속에서도 평안을 누린다. 우리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임하실 때에 평강을 누린다. 주님을 가운데 모시라.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운데 서셔서 기쁨을 주신다 (20절).
부활의 주님은 기쁨을 주신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부활의 주님은 악한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 주님을 보기만 해도 기쁘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만 해도 기쁘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기쁘다. 주님을 만질 때에, 주님이 만져 주실 때에 기쁨을 누린다. 주님을 만진 12년간 혈루증울 앓던 여인이 낫는다. 주님이 만져주시니 문둥병자도, 소경도, 죽은 사람도 다시 살게 된다. 기쁨을 회복해 주신다. 우리가 기쁜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기쁨의 Source가 되신다. 1) 과거의 죄용서 받으니 기쁘다 (마9:2). 2) 주님이 현재의 임재하시니 기쁘다 (마14:27) 주님이 가운데 오심은 언제나 기쁨을 동반한다. 3) 미래의 승리를 보장하시니 기쁘다 (요16:33). 우리의 미래는 세상의 정복자 예수 보장하신다! 주님이 이기셨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이긴다. 주님을 가운데 모심으로 기쁨을 누리자.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운데 서셔서 유용하게 만드신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유익되게 하신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서 쓸 수 있게 하신다. 우리의 1) 입을 유용하게 사용하자. 입을 무익되고 비생산적으로 쓸 수 있다. 입으로 무익하게 걱정, 근심, 원망, 저주, 바가지 긁는다. 하지만 우리는 입을 유익하게 쓰는 법을 계발해야 한다. 2) 우리의 발을 주님을 위한 심부름에 사용하자. 3) 우리의 손을 주님을 위한 일에 유익하게 쓰임을 받자. 주님을 위한 섬김과 헌신과 수고의 도구로 드리자. 4)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마음을 잘 관리함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이다. 나이가 많아도 젊게 산 나이 많은 청년들의 이야기가 많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요나, 아브라함이 나이와 관계없이 쓰임을 받은 경우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유지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자.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뜨거우면 헌신한다. 손도, 발도, 입도 드린다. 하지만 마음이 냉냉하면 손끝하나 움직일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마음을 뜨겁게하여 하나님과 교회에 유용하게 쓰임을 받자. 주님을 가운데 모시어서 유익한 사람이 되자!
넷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운데 서셔서 능력을 주신다 (22절). 부활의 주님은 능력을 주신다. 능력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천지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창2:7). 생기를 불어 넣으심은 성령의 역사이다. 주님의 숨은 재창조의 역사가 있다. 겔37장에 마른 뼈들에 생기를 넣어서 극히 큰 군대를 일으키신다. 정말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생기, 급한 바람이 각 사람 위에 분다. 성령충만케 하시고 능력을 받는다. 성령의 바람은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신다. 무기력하여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성령의 바람을 사모하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단 한가지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주님께 시간을 내는 것이다! 주님께 available하라. 은혜는 바쁜 사람들이 받지 못한다. 은혜는 주님께 available 한 사람들이 받는다. 내가 주님께 Available 한가?
가운데 서신 예수님은 평안과 기쁨과 유익하게 하심과 능력 주신다. 가운데 서신 주님을 모시자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며 나타내며 살자.

 
4/4/2010              예수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고,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우리에게 영생과 승리를 주셨다. 주님은 영원한 승리를 거두셨다. 예수부활의 은총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신데로 부활하셨다.
예언의 성취인 부활을 믿으라! 부활의 사건은 구약에 예언된 사건이다. 다윗이, 호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욥도, 부활을 믿었다. 에스겔도, 이사야도 부활을 믿었다.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의 예언이시다. 마태복음에 보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5번이나 예언하셨다 (마16:21; 17:22-23; 20:17-19; 26:2, 31-32).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제자들 믿지않았다. 하지만 원수들은 믿었다.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원수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에 대비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니까 흩어졌다. 절망했다. 하지만 원수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무덤을 돌로 막았다. 인봉을 했다. 군사를 동원해서 3일간 무덤을 지켰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신 것 처럼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미리 말씀하신 것 뿐 아니라 부활을 미리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바로 죽은사람들을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보여 주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 장사지냈다. 장례의 행렬을 멈추시고 살리셨다. 죽은 나사로는 죽어서, 장사지내고, 무덤에 들어갔다.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나사로를 살리셨다. 자신의 부활이시고 생명이심을 증명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자!

둘째로, 예수님은 부활의 수많은 증거를 남기셨다.
역사적인 사건이다. 부활을 확신하라!  예수 부활의 증거는 참으로 많다. 이세상에 가장 많은 증거를 남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증거들이 무엇인가? 1) 빈무덤은 부활의 증거이다. 천사가 보여준다.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종교 창시자들은 무덤을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는 빈무덤 자랑한다. 2) 부활의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10번 이상 나타나셨다.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 (도마없이), 제자들, 엠마오가는 2제자, 갈릴리 제자들, 5백여 성도, 야고보.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3)부활의 첫증인이 여인들이라는 사실도 부활을 증명한다. 4)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을 증거한다. 제자들은 의심했다. 마태도 마가도 증거한다. 그러나 그들이 변했다. 생명을 걸고 순교한다. 유일한 설명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5)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모든 설들의 허구성은 부활을 증거한다. 도난설, 기절설, 가사설, 영적부활설, 환각설등의 허구성은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 6)교회의 탄생은 부활을 증거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져 있다. 7)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역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부활을 확신하라.

셋째로, 예수부활은 증거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부활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신다 (7절). 부활은 긴급성을 가진 증거이다 (빨리가서) 먼저 그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라 명령하셨다. 증거의 내용은 3가지이다. 1)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2)갈릴리로 가셨고, 3)주를 뵈오리라 즉 부활의 주님 만날 것을 증거했다. 우리의 부활 증거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1)예수님이 부활하셨다. 2)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3)다시 오신다.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뵐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다 (10절). 감동적인 것은 주님은 제자들을 내형제라고 부르신다. 어떤 제자들인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실패한 제자들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부활하신 주님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죄용서 받았다는 증거이다. 영생을 얻었다. 내세를 소유할 뿐 아니라 이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린다. 하나님 나라 건설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1) 죽음이 죽었다. 2)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 3)우리는 희망의 찬가를 부른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4)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하신다. 우리는 예수 부활을 증거해야한다.

성도의 삶은 예수 부활을 믿는 것이다! 확신하자! 그리고 담대하게 증거하는 생을 살자!

 
03/28/2010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일곱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사랑의 스캔들이다.

첫째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저주 받을 인생에게 주시는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준다.
본문은 죄가 너무 많아서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깜짝 놀랄 사건 하나님 사랑의 스캔들이다. 어떻게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용서를 받나?  예수님이 강도들 사이에서 죽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1)예언의 성취이시고 (사53:9,12), 2) 주님의 엄청난 사랑의 증거이시다. 예수님은 죄인 아닌데 죄인의 자리에서 죽으셨다. 강도 바라바 대신에 죽으셨다. 바로 내가 죽을 자리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은 사랑의 표현이시다. 왜 한편의 강도가 구원받았나? 사실은 자격을 따지면 둘 다 똑 같이 자격이 없다. 그들은 함께 예수님을 욕했다 (마27:44). 그런데 어떻게 한편의 강도는 주님께 구원을 요청했나? 이 변화는 바로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또한 사랑의 폭팔적인 은혜를 누리는 자리이다 (엡2:7, 롬5:8). 이 두 강도들은 1)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다. 2)회복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을 잃은 사람들이다. 십자가 위에 매달려있다. 3)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4)저주받은 인생이다. 그런데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의 사랑의 제공하신다. 십자가이다. 기대할 수 없는 죄인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시다.

둘째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구원이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보여준다.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두번째 말씀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신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강도이다. 주님께서 직접 분명하게 확인해 주셨다 (43절). 이 강도는 구원받을 조건이 하나도 없다. 구원은 나의 공로나 노력이나 행위로 얻는 것 아니다. 구원은 온 세상 만물을 다 주어도 얻지 못한다. 행함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 대표가 바로 이 강도이다. 어떻게 강도는 순식간에 변하는가?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때, 십자가의 의미 깨달을 때 변한다. 구원받은 강도의 변화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한편의 강도는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시작한다. 온갖 거짓으로 불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비방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고 온 인류를 향해 주님은 저희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신다. 강도는 이런 사랑을 본적이 없다.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다. 예수를 믿으면 변한다. 세상과 종교는 구원받기 위해서 변하라 한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을 받았으니 변하라 하신다. 그렇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다.

셋째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바로 강도가 나 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신다.
사랑을 체험하니, 믿기를 시작하니 변한다. 강도의 변화  1) 자신에 대한 마음이 변한다. 내가 죄인이구나! 깨달았다. 강도의 변화 2)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변한다 (40절). 지금까지는 하나님 없이 살았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강도의 변화 3) 예수님이 의롭다고 믿는다 (41절). 강도의 변화 4) 기도에 대한 마음이 변한다 (42절). 지금까지는 기도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감정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5) 강도는 당신의 나라, 천국에 대하여 마음이 변한다. 지금까지는 세상나라만 보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천국이 열린다. 죽음이 가까울수록 천국이 더 분명해진다. 강도의 변화 6)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는다 (42절). 영혼을 부탁한다. 예수여! 구원자 예수를 부른다 (마1:20). 그리고 내가 당신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간구한다. 그렇다 바로 구원받은 강도는 나의 모습이다! 이는 1)내가 구원받은 강도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또한 2)내가 구원받은 것은 구원받은 강도의 구원과 같은 구원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대답이 너무도 놀랍다 (43절). 최고의 스캔들이다.
물론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성도의 모범은 아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강도는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다 소진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아직 주어져 있다!! 강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살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루 하루를 감격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았을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다!

 
3/29/2010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은 신앙고백을 듣고 기뻐하신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맨 처음 이 세상에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성경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린양 이야기가 흐른다.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제물이심을 말한다. 제물이 되신 어린양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된다. 왜 예수님이 양이신가? 그것도 어린양이신가? 예수님 약하시고 보잘 것 없어서가 아니다. 정반대이다. 어린양은 존귀한 타이틀을이다.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은 1) 죄용서해 주신다. 2) 또한 구원자 구세주이시다 (사53:7).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예수님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 온 세상을 죄를 지시는 희생제물 되심을 증거했다. 희생제물을 보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는다는 선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일을 감당하셨다. 지셨다는 말은 한번 지셨지만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없이한다 제거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죄를 지고 가신다. 예수 안의 죄용서가 있다. 예수님을 믿으라! 받으라! 누리라!

둘째로,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이시다.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에서 구원하신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을 때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유월절의 어린양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다는 것은 죽음에서 구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죽음으로 그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사람들의 장자는 살게 되었다. 피를 볼 때에 넘어가신 구원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대로 나타낸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1)흠과 티가 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2)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다. 3)유월절의 어린양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다. 주님은 바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 4) 유월절의 어린양은 뼈가 꺾이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모든 유월절 양들이 예표한 바로 그 유월절의 어린양이셨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어린양을 선택하는 니산월 10일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 잡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승리하셨다. 유월절이 어린양이 살린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단순한 양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의 사도 요한도, 세례요한도, 안드레도, 빌립도, 나다나엘도 모두 예수님이 하나심이심을 증거하신다. 부활하신 어린양은 무기력하고 약하지 않다. 계시록의 어린양은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승리자, 정복자, 심판자,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영원토록 통치하실 분이시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신다 (계21:22). 세례요한의 고백은 1) 오직 예수님께 집중된 신앙고백이다. 2)반복되어진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되심을 두번이나 증거한다. 그결과 1)나의 믿음이 굳건해진다. 2) 또한 다른 사람을 주님께 쫓게한다. 그래서 구원간증이 중요하다. 그리고 구원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안드레와 요한이, 안드레는 베드로를, 빌립은 나다나엘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어린양 속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생의 의미가 담겨져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님으로 속죄함을 얻고, 죽음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영원토록 찬양하자!
 

3/13/2010            구원의 확신

불확실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 속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첫째로,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1절).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다. 하나님이 성품을 믿지 못해 의심하고 (빌3:1), 자기의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엡2:8-9). 성숙치 못해서 자라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이다 (엡4:11-15). 마귀의 공격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확신하지 못한다 (롬8:37-38). 사단은 우리의 영적 정체성 identity 를 혼돈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를 공격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든 것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귀의 공격도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는 이유는 구원이 내가 공로로 수고로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신다. 그리고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 하나님 우리에게 영생을 직접 주시지 않으신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다 (요14:6). 아들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다 (요17:2). 하나님은 그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소원하신다. 아들이신 주님은 모든 희생을 다 지불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둘째로,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영생을 얻는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얻음, 영생 얻음의 열쇠이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다는 말은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 영접한 사람이다. 얘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예수를 믿으면 즉 모시면 영생을 얻는다. 하지만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아들이 그 속에 있느냐 없느냐가 구원의 관건이다.  또한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이 땅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서 걸을 것은 아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맥박은 가지고 산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한 미래 갖지 못한다. 생명을 아들에게 주심에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이 있다. 영생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예수님께 달려 있다. 나의 공로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 여기는 두가지의 면이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하나님 붙잡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1)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힘들 때에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이 예수님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붙잡아 주신다. 책임지신다. 지키신다. 끝까지 보존하신다. 또한 2)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 우리가 생명을 소유하고 싶어도 힘센 사단이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위험을 당할 염려가 없다. 우리는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 주님이 사단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다. 심판자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사단이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 3) 주님이 내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비록 내가 주님을 놓으려 해도 주님을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 그리고 반드시 구원얻게 하신다. 할렐루야!

셋째로, 믿는자가 영생을 확신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하시기 위하여서 요한1서를 주셨다 (13절).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구원은 성도의 기쁨의 근원이 된다 (눅10:22). 그래서 다윗은 범죄한 후에 구원의 즐거움 내게 회복해 달라고 기도했다 (시51편).    요한복음을 기록의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믿고 그 이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다 (요20:31).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첫번째 구원의 확신을 잃게하는 것의 반대를 행하면 돌 것이다. 더 확실한 것은 말씀을 깨닫고 믿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확신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확신하고 사는 것과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주님의 소원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구원의 확신 속에서 남은 날들을 승리하며 살아가게되기를 소원한다.


 
3/7/2010             네가 거듭나야하겠다

인생의 최고의 은총은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최고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밤중에 찾아온 최고의 종교인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다. 왜 거듭나야 하는가?

첫째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은 명령이다.
거듭남은 천국가는 유일한 길은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명령이다. 주님은 심각하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로 강조의 강조를 하신다. 3번이나 사용하셨다. 거듭나지 아니하면도 역시 거듭 강조하시면서 3번이나 강조하신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또한 하나님 나라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다.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 최고의 종교인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 하신다. 만약에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가장 구원받을 자격 있어 보이는 사람이 니고데모이다. 그는 1)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성경아는 사람이다. 또한 2) 종교인이다. 바리새인으로 최고의 종교생활을 한다. 3) 그는 높은 지위에 있다. 유대인의 관원이고 산헤드린의 멤버이다. 지위가 높고. 유명하고, 존경받는 종교인이다. 특권층이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텅빈사람이다. 온전히 잃어버린자 이다. 외적인 조건이나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니고데모가 적격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다. 종교생활로 구원받고자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당신은 니고데모인가? 아니면 거듭났는가?

둘째로, 네가 거듭나야하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은 천국가기 위해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두번의 생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배에서 세상에 나온 생물학적인 생일이 있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영적인 생일이 있다. 생명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주어지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부터 온다. 영적 생명도 영적 생명으로 부터 온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가? 불가능이지 않습니까? 반문한다. 주님은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5절). 물과 성령은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생명주심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님은 생명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이다 (엡2:1). 인간은 범죄함으로 영적생명이 죽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었다. 영적인 죽음은 육의 죽음 가지고 오고, 이땅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 맞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가는지를 모른다. 바람 자체는 볼 수 없으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 처럼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 바람이 인간의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는 것 처럼 성령의 역사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완전히 다시나야/한다. 다시 두번째로 나야한다. 이것은 위로부터 나는 것이라 하신다. 니고데모는 믿어지지 않는다. 주님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신다. 어찌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0절), 그리고 그 이유는 주님의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1절) 하신다. 주님은 머리로 풀지말라. 주님의 밀씀을 믿으라. 그 증거를 받으라! 하신다. 머리신앙에서 가슴신앙으로 가는 길은 거듭남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보이신다. 놋뱀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 예언 (14절)을 하신다.  죽으심의 이유는 믿는자마다 영생 주시기 위함이다 (15절). 주님의 오심의 목적은 영생 (15절/16절/17절) 이다.

셋째로,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거듭남의 방법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관계가 변한다. 신분이 변한다. 호칭이 변한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여, 선생님 하면서 존경을 보인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메시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온다. 우리의 의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해답이시다. 회개하고 / 예수님을 믿으면 산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도 보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복된 인생으로 살자!

 
2/28/2010             믿음의 경주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은 인생은 경주로 비유했다. 우리는 인생은 경주이다. 어떻게 경주해야 하나?

첫째로, 우리 인생의 경주는 믿음으로 하는 경주이다.
올림픽은 실력의 대결장이다. 그래서 실력을 배양한다. 우리의 경주는 믿음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배양해야 한다. 본문은 이러므로 (v1)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수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관람자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선진이다. 우리 신앙의 표본이 되고 모델이 된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충성을 다했다. 믿음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좌절하지 말고 충성을 다하라 권하는 것이다. 그 증인들은 둘러싼 증인이요, 구름 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다.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보면서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다. 이들은 믿음의 길을 개척한 개척자들이다. 수 많은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간 믿음의 경주를 따라가면 된다. 올림픽은 메달을 따진다. 하지만 믿음의 경주는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메달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주를 하면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은 믿음의 인생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주도 믿음의 경주이다. 믿음이 없는 경주는 금메달을 받아도 수 많은 성취를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의 경주를 하자!

둘째로, 믿음의 경주란 인내로 하는 경주이다.
인내로써 경주하려면 경주자의 벗어 버릴 것들이 있다 (1절) (1) 먼저 무거운 것을 벗어야한다. 선수의 방해되는 체중이나 최선을 다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선수는 가벼어야 한다. 돈을 사랑함, 자만. 세상을 애착함은 장애가 된다. 우리를 가볍게 하는 줄 알고 취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망하게 한다. (2) 또한 얽매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한다. 죄는 경주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연약성과 불순종을 말한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우리는 (3) 경주를 해야한다. 결승점이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야한다. 인내를 배우자. 어떻게 인내하나? 주님의 인내를 배워야 한다. 주님은 참으셨다. 주님의 참으심과 인내는 우리 인내와 믿음 근거가 된다. 본문에는 참으사라는 말이 반복된다 (2절, 3절). 무엇을 참으셨나? 우리는 무엇을 참아야 하나? (1)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셨다 (2절).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으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을 보셨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보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다. (2) 주님은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2절). 우리도 주님을 위한 부끄러움, 실패, 가난함, 무시당함을 참아야 한다. 낙심하지말라. 인내하자. (3) 주님은 사람을 참으셨다. 누구인가? 거역하는 사람들을 참으셨다. 주님의 참으심을 배우자. 이것까지. 마지막까지 참자. 참으심의 결과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시 110:1; 2:5-9; 8:1,2; 10:12,13). 영원히 앉으셨다. 주님의 인내가 우리의 위로와 격려가 된다. 인내로 경주하자.

셋째로, 믿음의 경주란 예수님 만을 바라보는 경주이다.
바로 예수님이 경주의 목표이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1) 믿음의 주이시다. 2) 온전케 하시는 주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1)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을 목표삼고 그 목표를 잃지말자. 주님으로 부터 시선을 돌리지 말라. 주님은 믿음의 출발점이 되시고 결승점이 되신다. 사람들은 좋은 예들은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초점과 목표는 아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모델이 되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의 기쁨을 위해서 고난을 견디셨다. 인생의 승패는 예수 만나서 믿는가에 달려있다. 믿음의 경주 승패도 예수만을  바라보느냐에 있다. 김연아의 승리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그렇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줄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주님의 칭찬을 받자. 하루 하루를 살자. 믿음으로 살자!

 
2/21/2010           나를 사랑하는 주님

어떻게 주님을 위한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어려운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고난을 이길 수 있을까? 베드로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첫째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이 우리를 향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돌보심이 이기게 한다.
하나님의 눈은 두가지 면이 있다. 의인을 보시는 눈이 있고, 악인을 보시는 눈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1)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또한 사랑하신다. 주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실망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신다. 나를 힘들게 하는 frustration 아시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의심하는 나의 꿈을 아시고, 나를 힘들게 하는 공포와 두려움 아시며,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도 아신다. 나와 당신을 아신다. 2)주님의 눈은 은밀한 중에 보신다 (마6:4,6,18).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 Coram Theo 에서 살아간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 때문에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다. 코람데오의 삶을 살자. 3)나를 돌보시는 눈이 있음을 알기에 외롭지 않다. 무섭지 않다. 힘들지 않다. 주님의 격려를 받는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를 지켜 봐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아는 것은 인생의 능력과 행복이다.

둘째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귀는 간구에 기울이신다. 기도응답이 이기게 한다. 
귀를 기우리시는 주님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렇다.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내가 고통 중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신다. 그리고 나의 마음 깊은 곳의 소원을 들으신다. 성경에는 인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로 가득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나 자식이 없는 라헬의 기도를 들으신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귀를 기우리시는 주님은 악인의 원망을 들으신다 (민11:1). 하나님께서 들으심을 깨달으면 우리의 말과 행실을 조심하게 된다. 두려운 하나님으로 경외한다. 하나님은 들으시되 급히 빨리 용건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이야기를 다 천천히 들어주신다. 나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을 믿으면 어떻게 하나? 1)주님이 귀를 기우리시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베드로의 믿음이었다. 2) 주님이 귀를 기우리시니까 바른 것을 구하자. 우리의 기도는 잘못된 것을 향하여 있을 때가 많다. 기도가 방향을 잘못잡고,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다. 성도들은 대표적으로 건강과 행복과 성공을 원한다. 치유된 몸, 집, 음식, 직장, 자동차, 남편, 아내, 출세, 더 많은 돈을 기도한다. 하지만 이것이 기도의 전부일 수는 없다. 바울과 베드로에게는 이런 것들은 매우 낮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다.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자.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하신다. 할렐루야!

셋째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를 향하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한자들에게는 진노이요, 주님의 사랑을 입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이다.  주의 낯은 여호와의 낯, 하나님의 낯, 주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의 낯은 의인을 향하신다. 이것은 은혜 중에 은혜이다. 감격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하시는 주님의 얼굴은 사랑의 얼굴, 불쌍히 여기는 얼굴, 은혜 주시는 얼굴이다 (민6:25-26). 의인은 여호와의 낯을 돌리심을 싫어한다. 늘 그분의 얼굴을 보기를 소원한다. 범죄 했을찌라도 주님을 향함은 회개와 돌아옴을 주신다. 힘의 동력이고 기쁨의 근원이다. 또한 주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를 향하신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사람은 멸망과 절망에 빠진다. 악인에게 주의 낯은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이다. 그리고 이땅에서의 심판도 있다. 성도들에게 주의 낯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간섭하신다. 악에서 구하여 주시고, 절망에서 구하여 주신다. 승리케 하신다.

베드로는 증거한다. 우리가 소망가운데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주님의 눈, 주님의 귀, 주님의 얼굴을 향하시고 은혜 주시는 주님께 가깝게 나가자.

 
2/14/2010            기드온의 삼백명 용사들

성경의 전쟁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병사나 장비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어떻게 영적 전쟁을 감당할까
?


첫째로, 우리는 기드온 300명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불가능을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안주하던 사람들은 아니다. 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시대가 불가능이라고 선언한 것을 향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기드온의 300명은 보통 사람들이다. 미디안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했다. 산에 동굴을 파고 숨었던 사람들이다. 메뚜기 떼와 같은 거대한 세력 앞에서 숨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진다. 이들의 능력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이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시다. 이들이 불가능을 향해 도전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삿7:9).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는 순간, 그 말씀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간 강력한 군사가 되었다. 우리가 언제 강해지나? 나의 힘으로 이 전쟁에는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때이다. 나의 연약을 깨닫고 엎드려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순간이 가장 강해지는 순간이다. 나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순간 우리는 불가능을 향해서 도전하는 믿음과 능력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 인생의 불가능을 향하여 도전하자
.

둘째로, 우리는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 처럼 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 처럼 결단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들이 사용하고 싶은 방법은 창과 칼이었다. 약대를 타고 전쟁하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들게 하셨다. 생명을 건 기드온의 300명의 전술이었다. 이 전쟁의 키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수확을 줍는 것일 뿐이다. 이들이 사용할 무기도 전쟁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기이다. 이들이 사용한 모든 무기들은 하나님이 주신 무기들이다.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질그릇 항아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다. 항아리가 비어야 횃불이 들어간다. 승리를 위하여서는 우리는 깨어져야한다. 횃불은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서 영적인 진리가 있다. 영적전투의 방법이다. 인생살이의 방법이다.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내가 비어지고 깨어짐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승리를 얻는 것이다. 언제 능력이 나타나는가? 능력을 받은 능력자가 되어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수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과 함께 역사를 결정하시고, 운영해 가신다
.

셋째로, 우리는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장애를 극복한다.
그들은 어려운 난관들을 통과한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의 자존심 싸움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시비를 걸어 왔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왜 처음부터 자기들은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8:1b). 기드온은 누가 원수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를 혼돈하지 않는다. 원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였기에 그 위기를 겸손함으로 넘긴다. 그리고, 도망가는 미디안을 쫓아간다.  2) 요단강 동편 숙곳 사람들의 비협조가 있었다. 도리어 원수를 돕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의 용사들은 사람들의 비협조에서도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서 묵묵히 달려간다. 3)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은 지쳤음에도 끝까지 사명을 다한다. 그들은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 (8:4) 순종을 한다. 은혜받는 비결은 적당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은혜받는 비결도, 완벽한 승리의 비결도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이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은 피곤하지만 지쳤지만 그것으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은 힘을 다하여 원수를 쫓았다. 영적전쟁은 철저하게 승리해야 한다.이들의 완전한 승리의 결과가 무엇인가? 미디안의 복종이다. 태평함이 40년간 온다 (사사기8:28). 헌신의 결과가 철저한 승리의 열매를 두고 두고 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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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드온의 3백명의 용사들처럼 사명을 감당하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7/2010            먼지 덮힌 성경

므낫세와 아몬시대의 비참한 암흑시대는 먼지 덮힌 성경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인생의 암흑도 나의 먼지 덮힌 성경에서 유래한다. 어떻게 암흑시대에서 은총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첫째로, 가서 성경을 찾으라
요시아 시대의 사정은 어려웠다. 므낫세와 아몬의 시대는 극심한 우상숭배의 시대이었다. 우상숭배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망했다. 그런데 남쪽 유다도 똑같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것을 선고받는다 (21:10-15). 요시아는 여호와 신앙회복을 위하여 성전 보수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  므낫세 시대를 지나면서 성경을 잃은시대가 되었다. 성전에 성경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성경은 먼지가 덮히게 되었다. 멸망이 문턱에 오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성경을 잃으면 불신앙에 빠지고, 세속화되고, 죄악의 물결을 이길 수 있다. 방법은 성경을 찾음으로 회복된다. 성경을 찾으면 인생이 회복된다. 신앙도 회복된다. 죄악의 물결도 거스려 이길 수 있다. 성경을 찾자. 과연 나에게 성경은 어디에 있는가? 가깝게 있나 아니면 멀리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결과와 원인이 된다. 성경을 잃으면 인생의 유리한다. 하나님과 멀어진다. 성경을 찾지 않으면 인생을 찾지 못한다. 행복도 찾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도 찾지 못한다. 성경을 찾으라!

둘째로, 가서 성경을 읽으라
요아스는 찾은 율법책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율법책을 읽는다. 읽을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요시아는 옷을 찢고 회개한다. 말씀을 읽는 것은 은혜받는 비결이다.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이 복 중의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위기와 역경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어그러진 인생을 바로 잡는 길이다. 무너진 인생을 세우는 길이다. 요시아가 성전보수하니까, 하나님은 요시아 회복시켜 주신다. 성경은 말씀을 듣는자와 읽는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은 성경 소유하는 것이다. 먼지가 쌓인 성경은 죽은 성경이다. 먼지 쌓인 인생을 산다. 쓸모 없는 인생이 된다. 성경책을 찾아 읽으라. 인생이 바뀔 것이다. 성경을 읽다가 변화된 수 많은 사람들의 간증이 넘친다.
요시아는 말씀을 읽음으로 회개하고 순종하여 복된 인생을 산다. 여호야김은 (렘36:23-24) 예레미아의 글을 바룩이 가져다 줄 때에 화롯불에 던져 불태워 버린다. 그는 마침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다. 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으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사랑을 느끼고, 은혜를 받고, 기쁨 누린다. 성경을 읽음으로 은총시대로 나아가자.

셋째로, 가서 성경말씀을 순종하라.
요시야는 성경을 찾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백성들의 무지와 불순종을 발견한다. 말씀을 지침서로 삼으니 나의 순종하지 못한 생활을 회개한다. 오로지 절대진리인 말씀을 붙잡는다. 말씀을 순종한다. 인생의 개혁이 일어난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 아는 길은 1)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2)말씀을 경청함에 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귀를 기우리라. 순종하기 위하여 듣자. 순종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자. 다른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끊고 말씀에 모든 것을 집중하자.

성경은 말씀을 듣는자와 읽는자와 그 가운데 기록된 데로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말씀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암흑시대를 쫓아내고 은총시대를 열자.

 
1/31/2010           최선을 기대하라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최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자원에 연결되어 사는 비결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생에 기대한 것을 얻는다. 바울은 믿음생활이란 환경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최선을 기대하는 사는 상활임을 보여준다
.

인생에 대한 두 종류의 접근법이 있다.
먼저, 두려움의 인생이 있다.
두려움의 인생은 소극적이고, 비관론자이다. 욥은 두려움이 있었다. 욥은 두려워하는 것이 임했고, 무서워하는 것이 미쳤다고 고백한다 (욥3:25).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다. 두번째는 믿음의 인생이다. 믿음의 인생은 적극적이고 낙관론자이다. 바울은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증거한다 (빌1:20). 바울은 낙관론자이다. 그는 감옥 속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바울의 인생의 접근법은 최선을 기대한다. 성도는 최선을 기대하며 사는 존재이다. 최선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인정함을 보여주는 믿음의 태도이다. 또한 우리의 능력이상을 발휘하게 되어진다. 운동선수들은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 경기의 승리와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능력보다는 태도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의 긍정적 태도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풍성함 때문이다. 하나님과 친밀함의 언어이다. 믿음의 언어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최선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주신다. 다윗은 믿음으로 최선을 기대하며 골리앗과 싸울 때에 그대로 주셨다. 최선을 기대한 사람의 대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을 기대하셨다. 죽음을 앞두고 부활을 기대하시고, 고난을 앞두고 영광을 기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의지하심의 믿음의 언어이었다. 나는 어떤 바이러스를 퍼트리나? 불평의 바이러스 or 격려의 바이러스 인가? 비관의 바이러스 or 낙관의 바이러스인가
?

그렇다면 어떻게 최선을 기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 수 있나?

1) 하루를 믿음으로 시작하라.
매일이 중요하다. 하루 하루를 잘 살아야 한다
.
실패자는 다음으로 미룬다. 승리자는 날마다 아침마다 믿음으로 시작한다. 낙관적 태도는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으로 시작된다 (시편5:3). 주님이 승리의 인생을 사신 비결도 아침마다 아버지와 함께 시작하신 기도생활이었다 (막1:35). 하루를 믿음으로 시작하기 위해서 아침에 주님과 시간을 보내자
.

2)
현재 상황에서 좋은 것을 찾아보라
.
우리의 상황과 형편의 모든 것이 다 선하고 좋은 것 아니다. 하지만 상황의 좋은 것을 찾으라 (롬8:28).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문은 나쁜 것에서 선하고 좋은 것 만드시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든지 좋은 것을 찾아 감사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3)
문제들을 하나님께 드리라
.
불가능한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하나? 14-15절에 보니 기도한다. 아버지께 기도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한다. 문제를 주님께 드리는 법을 배우라.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문제를 극복하는 비결이다
. 

4)
부정적인 말들을 제거하라.
사람의 말의 능력이 있다. 부정적 말은 사람을 김빠지게 한다. 우리의 능력을 빼앗아 간다. 믿음의 말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지고 오지만 부정적인 말은 그대로 실패를 가지고 온다
. 

5)
긍정적인 사람들과 가깝게 하라.
실망과 절망의 시기에 희망적 사람들과 가깝게 함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사람들을 주변에 두라. 의도적인 노력 필요하다. 잘못된 군중과 어울리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한다. 주변의 사람들 중요하다. 낙관론자도 전염되고 비관론자도 전염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6)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미래를 기억하라
.
용기를 잃고 실망될 때 어떻게 낙관적일 수 있는가?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의 축복된 소망이 있다. 예수를 믿는가?, 믿음을 예수 안에 둘 때에 우리의 인생의 마직은 보장된다. 이 인생은 끝이 아니다. 천국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면 우리가 기대하는 천국을 누린다.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상급이 있다
.

우리는 최상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의 태도이다.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최상을 기대한다. 주님이 동행하시기에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상을 기대하는 것이다. 금년도 주님이 주실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면서 살자.

 
1/24/2010            한 가지 일을 구하리니

 나의 평생에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은 평생에 한가지 그 일을 구한다고 했다. 다윗이 원하는 한가지 그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세가지 질문을 통해서 접근한다. 

 첫번째,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구하는가 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다윗이 평생에 구한 일은 한가지이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여러가지 것을 구한다. 좋은 교육, 직장, 배우자, 많은 친구…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지속적인 기쁨과 평안울 주자 못한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못한다. 이런 것만 구하고 살면 우리의 영혼은 황폐해 진다. 우리는 여호와를 구해야 한다 (신4:29). 그 한분을 만나는 것이 행복이다. 만약에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하품이 나고 boring 하다면 이것은 불행하다. 말씀이 하품나고, 기도가 하품나고, 찬양이 하품나고, 전도가 하품나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된다. 친밀한 관계가 있으면 모든 것이 감동적이된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 없으면 모든 것이 하품이 난다. 우리는 하품나는 관계를 청산하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가야 한다. 다윗의 갈망은 오직 여호와이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성공의 비밀이었다. 여호와가 아닌 다른 모든 선택은 바른 선택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구하자. 

 둘째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 거하는가 이다.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  어디에 거하나는 매우 중요하다. 환경이 중요하다. 내가 누구와 함께 거하는가는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신앙의 사람들과 가깝게 하면 믿음이 자란다. 하지만 불신앙의 사람들과 함께하면 믿음 약해진다. 카멜리온 신자과 함께 하면 환경과 주변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타협을 배우고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와의 집은 이 세상 최고의 장소이다. 여호와를 알게되는 곳이다. 인생의 행복을 발견하는 곳이다. 평안과 위안의 장소이다. 아버지의 집이다. 그래서 신앙생활 비결은 여호와의 전에 대한 사랑을 가지는 것이다 (4절). 그래서 다윗은 생전에, 평생 동안에, 그가 생존할 모든 날 동안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소원했다. 여호와의 전을 사모했다. 여호와의 임재 앞에서 살았다. 그가 왜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가? 왜 하나님과 친밀함이 필요한가? 그에게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7편 주제는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이다. 1-3절은 다윗이 확신이 너무도 강하기에 어떠한 두려움도 짓누를수 없다. 과거의 승리를 확신하니(2절) 미래의 승리도 확신한다 (3절). 여호와께서 다윗의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신다. 여호와께 다 있는데 어디 다른 데로 갈 필요가 있는가? 인생의 모든 것이 것이 주님께 있다. 여호와의 집에 항상 거하자! 

 셋째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바라 보는가 이다.
오직 여호와만 바란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있다. 앙망한다는 말은 계속 강하게, 고정하고 쳐다보는 것이다. 세상과 사단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오직 예수를 바라본다. 주님은 오직 나를 바라보라 하신다. 1)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한다. 성전 예배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은 친밀함의 증거이다. 사랑하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친밀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친밀함의 증거이다. 말씀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답고, 구원이 아름답다. 그래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 앙망하는 자는 힘이 샘솟듯 한다. 2)또한 다윗은 그 전에서 사모한다. 사모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함을 말한다. 더 사모하게되면 더 깊음을 누린다. 더 아름다움을 누리게 된다. 더 비밀스러움 사랑을 나눈다. 이것이 어떻게 충족되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충족된다. 그 전에서 사모한다. 어떻게? 그분의 발 앞에서 공부한다. 묵상한다.
 우리는 많은 것 추구하며 살 필요가 없다. 오직 한가지 일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그것이 바로 승리하는 인생의 비밀이다. 여호와와의 친밀감을 추구하는 그는 승리하는 위대한 신앙인, 위대한 정치인, 위대한 인생을 산 다윗이 되었다. 금년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깊어지게 하자! 더 깊은 친밀함으로 나가자! 거기로 부터 모든 은총이 쏟아진다

 


 
1/17/2010            제직의 자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한인 역사에 남는 좋은 교회, 훌륭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하고 보람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는 생활이다. 청지기인 제직의 자세는 무엇인가?

 첫째로, 제직의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위한 일군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신분의 변화되어야 한다. 성도의 생활의 기본은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 주님의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난 인생은 변화된다. 성경에 보면 주님을 만나서 변한 인생의 간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어졌다. 예수 만난 사람이 제직이 될 수 있다. 예수 믿어야 제직의 사명을 감당한다. 더 나아가서 2)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예수님의 주인으로 모셔야 우선순위가 세워지게 된다. 제직이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세운 일군들을 말한다. 예루살렘교회에 일곱집사 제직을 세움으로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되고 제자들의 수가 증가되었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복종하게 되었다 (행6:1-7). 제직들이 바로 잘 세워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복음의 역사가 나타난다. 

 둘째로, 제직의 자세는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이다. 청지기는 집 주인 대신에 가옥의 재산과 경영을 담당하는 경영인이다. 우리가 청지기라는 것은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기에 주인이 되신다. 또한 우리는 사명을 맡은 자이다 (창1:28). 나의 소유가 내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이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이다. 1)청지기는 주인의 대리자이다. 2)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나 주인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한다. 3)청지기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다 (고전4:1, 엡3:9). 제직은 주님의 교회를 주관하는 청지기이다 (딤전3:15). 청지기는 주인이신 예수님께 충성을 하는 것이다. 충성을 어떻게 하는가? 시간을 드림이 충성이다. 변함없는 것이 충성이다. 작은 일이나 큰 일에나 다 한결 같은 것이다. 좋은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 같은 것이다. 청지기로서 충성하자. 

 셋째로, 제직의 자세는 건강한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다.
잘못된 주인의식은 마치 자기가 교회의 머리인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주인의식은 필요하다.제직다운 행동은 지혜로운 제직이 되는 것이다. 자리에 꼭 맡은 행동을 보인다. 설 자리와 할 일과 나설 때와 말할 때를 아는 것이다. 1)건강한 주인의식은 책임을 질 줄 아는 행동이다. 책임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2)건강한 주인의식은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아는 행동이다. 제직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지킴은 교회의 덕과 하나됨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잃을 때에 실패한다. 위치를 떠나면 오만불손해진다. 교만해진다.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게 된다. 3)건강한 주인의식은 자기 사명을 다하는 생활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을 감당할 때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그 무엇으로 보답할까? 찬송의 고백처럼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죽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주님 앞에서 제직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바로 최고의 보람된 인생을 사는 길이다.


 
1/10/2010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나? 왜 내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나?

 첫째로,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요13:34)이다. 주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1) 주님은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셨다. 본문은 남편은 아내를 주님의 사랑처럼 사랑하라고 하신다 (25절). 예수님은 교회 위해서 자신 주셨다. 2) 주님은 교회를 돌보신다 (29절). 3) 주님은 교회가 상처를 입을 때에 주님이 상처를 입으신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기 전에 교회를 핍박했다. 그런데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다. 교회를 핍박함이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4)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다 한다.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우주적교회는 사랑하는데 문제가 많은 지역교회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은 되지 않는다. 주님은 지역교회를 사랑하신다. 머리되신 주님을 부끄럽게 하는 몸되는 우리이지만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끔찍하시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니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특징은 무조건적이다. unconditional 이다. 1)가족은 가족의 비밀 지킨다. 똘똘 뭉친다. 보호해 준다. 자녀들은 (1) 가정에서 양육을 받는다 (29절). 주님은 교회를 양육하고 보양해 주신다. 성도는 교회에서 양육을 받는다. (2) 가족은 은혜가 지배한다. 가족은 능력데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공급받는다.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 가장 필요로 한 사람이 쓴다. 설사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고 사랑을 중지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처럼 우리는 서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고, 사랑한다. 죄를 극복하게 돕는다. 2) 가족은 피로 연결된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피로 연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영적인 혈연관계를 갖는다. 한가족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는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된 관계이다 (요1:12).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서로가 형제/자매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 상속자 가 된다. 3)가족 안에서 우리는 서로 알고 경험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강한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다. 우리는 하나됨으로 어려움을 능히 뚫고 나간다. 하나님의 가족된 은총을 누리자! 

 셋째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신부인 교회는 주님의 흩어지지 않는 집중적인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성경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라고 계시하신다. 부부는 가족보다 더 깊은 관계이다. 부부는 서로 부끄러움이 없다.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다 (창2). 무슨 모습이든지 보일 수 있다. 신랑은 신부가 가난해도, 미천한 신분도, 과거의 잘못도 덮는다. 왜 그러시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부관계는 사랑이 지배하는 관계이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자격있는 신부인가? 결단코 아니다. 고멜도, 술라미 여인도, 그리고 지역교회들도 다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여 자기를 십자가에서 주셨다 (25절),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사랑이다 (26절). 그것도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신다 (27). 고멜이 영광스러운 선지자의 아내가 된다. 술라미 여인이 왕의 아내가 된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사랑이 지배하는 관계이다. 주님과 나는 연합된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다. 이것이 큰 비밀이다!
 많은 교회가 어려움 중에 있다.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것은 교회이다!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보는 눈이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주님이 사랑하는 우리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를 사랑하자.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해가 되자!

 


 
1/3/2010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새해에 어떻게 어려운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하신다.

 첫째로,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말씀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먼저 말세에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을 말한다. 말세에 사람들은 1)타락한다. 2)거짓과 이단의 가르침을 따른다. 3)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세종류의 죄에 빠진다. 1) 자신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 (2-4절) 2)이웃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 공동체를 손상시키는 죄이다. 3)더나아가서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는다. 바울을 ‘그러나 너는…’ 으로 대조의 생활을 보여 주신다. 어떻게 사는가? 말씀을 배우라  하신다. 사실 계속 배울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배울수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배울수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예수님은 teachable 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무엇을 배우나? 이단과 반대되는 복음의 바른진리이다. 성경을 배운다. 누구에게서 배우나? 외조모와 어머니에게서 배우고 (딤후1:5) 또한 바울에게서 배웠다 (딤전1:2). 과거에 배웠을 뿐 아니라 계속 배워간다. 왜 성경을 배우나?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는 지혜주시기 때문이다 (15절). 나는 어떤가 나는 배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배우기를 정지했는가?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사모하는가? 배우기를 사모하자. 말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는 한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둘째로,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말씀을 확신해야 한다.
본문에 확신이라는 말은 어떤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신념을 말한다. 배우면 깊이 배울 때에 단순한 지적 충족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되어진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배우고 확신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무 부활이 지나갔다면서 성도들을 미혹했다 (딤후2:17-18). 진리의 말씀에 확신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라 권면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가? 그렇다. 확신하라는 것은 명령이다. 확신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복음, 구원 모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확신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성경은 어느 부분은 분명한 것도 있는데, 자세히 말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다 그 이유가 있다. 그래서 정직한 태도가 필요하다. 성경이 확신할 수 있게 말씀하신 것은 확신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는 부분은 주님께 맡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기준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에 있다. 마지막 시대는 새로운 것, 기발한 것,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중요한 것 아니다. 이미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명하신다. 확신해야 하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배우고 확신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1) 유익하고 (16절) 2)온전케 한다 (17절).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한다. 확신이 없어서 늘 흔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의 원하심이 아니다. 배운 말씀은 확힌해야 한다. 확신할 것을 확신하자! 

 셋째로,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는 배우고 확신한 말씀에 거해야 한다.
거하라는 말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 버릴 수 있다 (계2:4).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바른 진리를 굳게 믿고, 복음의 진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신앙을 지킴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배운다. 또한 확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배우고 확신한 것에 거할 때에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 배운 말씀은 확신해야 한다. 순종할 때에 누리게 된다. 확신된 말씀 그대로 사는 것이 거하는 것이다. 말씀에 거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요10:10).
  인생의 최고의 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투자하는 것이다. 결단코 후회함이 없는 은총으로 다가오신다. 새해를 어떻게 살까? 말씀을 배우자. 말씀을 확신하자. 그리고 확신된 말씀을 누리자!